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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뮤지컬] 울지마 톤즈, 감동적인 이야기 - 그러나 조금 부족해 보였던 드라마

뮤지컬 <울지 마, 톤즈>는 이태석이라는 신부가 아프리가의 오지에서 구제 활동을 하는 이야기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이태석 신부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바티칸에서 상영된 적도 있다고.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 마, 톤즈> 소개 보기, 영화 극장판이 유튜브에 있는 거 같은데?)

이 글은 본격적 비평이 아니다. 이태석 신부의 삶을 평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연극을 보면서 든 단상을 적는 것이다.

이 단상은 대체로 밋밋했던 극에 대한 불평을 적었다. 그러나 적어도 <죽여 주는 이야기> 같은 쓰레기 극과는 결이 다르다. 뮤지컬은 화려하며, 연기력도 좋다. 드라마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하고 아쉬운 점만 쓰는 게 좀 마음에 걸린다. 이태석 신부의 감동적인 삶을, 뮤지컬로 느껴 보고 싶은 사람은 이 연극을 봐도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군무가 상징하는 바는?

오프닝 군무는 볼 만했다. 멋졌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원시성을 부정적으로 상징하는 것처럼 보여서 불편했다. (설마 건강성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겠지.) 아프리카는 충분히 혼돈에 휩싸여 있다. 그래서 부정적으로 묘사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원시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기 때문에 굳이 한 마디 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소년병의 존재와 충격?

극중 이태석 신부는, 마음을 열지 못하고 아이들을 괴롭히는 봉고라는 남자아이의 어린 시절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10살도 안 된 아이가 전쟁에 투입됐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이다.

그런데, 내전이 있는 수단에 갔던 이태석 신부가 그걸 몰랐을까? 기본적인 사실일 텐데. 아마도 이태석 신부는 알고 가지 않았을까?

알고 갔을 텐데, 연극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런 에피소드를 넣은 것이라면 작가는 너무 나이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다의 죽음과 좌절, 그러나 극복은?

로다는 이태석 신부를 곁에서 가장 열심히 돕던 여자 아이다. 간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북 수단 군대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다.

이태석 신부는 무력감을 느끼고 꿈을 꾼다. 여기까지는 개연성도 있으며,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좌절을 잘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극복은 별다른 사건을 거치지 않는다. 내면의 고통을 표현한 부분이 나오기는 하지만, 극복의 매개는 꿈에서 들은 메시지 하나다. 이태석 신부는 꿈에 나타난 이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는 "네가 영광을 얻으려고 여기에 왔느냐" 하는 메시지를 던진다. (흑 ㅠ 본 지가 꽤 되서 정확한 메시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태석 신부는 바로 그 메시지를 듣고 기운을 차린다.

물론, 좌절을 극복하는 계기가 메시지 하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훌륭한 문학 비평가는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좌절을 극복하도록 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다. 이런 식의 극복이 이태석 신부의 진정한 위대함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신의 메시지가 좌절 극복의 매개라면, 인간과 세상의 대결 와중에 좌절하거나 좌절을 극복하는 ‘인간’을 그린다는 근대 소설(및 극)의 정의는 실종되는 것 아닌가.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중심에는 그 ‘인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신이 아니라.

물론 이태석 신부가 고뇌하는 장면을 그렸다는 점은 쳐 줄 수 있다. 그래서 이게 신화가 아니라 연극이 될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너무 짧고 극복은 너무 쉽다.

전쟁의 종결

이태석은 전쟁이라는 상황이 모든 것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병원과 학교를 지어도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따라서 전쟁에 맞서야 한다. 이런 결론을 내린다.

나는 기대했다. 이태석 신부의 아주 작은 실천이라 소개될 것이라고.

그런데 어이없게도, 전쟁은 그냥 끝났다. 자연현상처럼 말이다. 

물론 이태석 신부가 전쟁이 끝나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지만 전쟁이 끝나야 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결론을 내렸다면 작은 변화들이라도 보여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의 변화만 있었고 실천의 변화는 소개되지 않았다. 아쉬운 점이다.

---- 이하 스포일러일 수 있음 ----

암으로 죽음

이태석 신부는 한국에 귀국했다가 암으로 죽는다. 극적인 삶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심지어 그를 둘러싼 사람들도 별로 고민이 없어 보였다. (어미니의 잠깐의 울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어머니의 연기는 아주 괜찮았다.) 그의 죽음은 성자의 죽음처럼 받아들여졌다. 밋밋했다. (특히 동생의 갈등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짧았던 걸까.)

물론, 실제로 그의 죽음을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그랬을 수 있다. 하지만 내면의 갈등조차 없었을까? 그런 것을 찾아 표현하고 '성자'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진정한 내면을 통해 그들의 진정한 강인함을 표현하는 것이 문학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 극에 그런 것은 부족해 보였다.

맺으며

한 편의 정돈된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굴곡 있는 드라마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좀 나은 위인 전기를 읽은 것 같았다. 그러나 위인의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 본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비평감이 됐다는 점에서 스토리도, 연출도, 연기도 있는 극이다. 창작극인데, 비판 위주로만 쓴 것 같아서 좀 걸린다.

연극을 보고 우는 사람도 꽤 있었다. 나도 가슴 찡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따라서 볼 만한 연극이다. 다만, 아쉬운 부분들이 꽤 있었다. 이태석 신부의 삶은 충분히 감동적인 드라마일 텐데, 그걸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 같다는 말이다.

여튼간에, 별 3개 쯤 줄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로 내가 본 <죽여 주는 이야기>는 별 하나도 못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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