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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교육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테러

일제고사를 보지 않을 권리를 학생들에게 설명한 서울 교사 7명이 중징계를 당했고, 얼마 전 서울에서 한 명이 추가돼 8명이 됐다. 다른 지역에서도 중징계를 당한 교사가 있었다. 장수중 교장은 ‘멍청하게’ 문맥을 읽지 못하고 말 그대로 교육청이 시키는대로 교사들과 논의를 통해 볼지 안 볼지 결정했다가 또 징계를 당했다. 바람 잘 날 없는 교육이다.

일단 불법성부터

한 교사는 일제고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원래 진단평가란 교사가 가르치기에 앞서 학생을 이해하기 위해 자기 주도적, 창의적으로 시행하는 것이며, ‘학업성취도평가’는 국가교육과정의 현장 적합성 등을 점검하기 위해 일부를 표집해 시행하는 연구 목적의 평가다.

따라서 ‘일제고사’는 법적 근거도 없는 권력 집단의 월권행위이며 청소년에 대한 권력형 ‘테러’다.

송재혁(전교조 교사), 일제고사 는 청소년에 대한 ‘테러’다, 〈저항의 촛불〉

한마디로 일제고사는 불법이다. 그냥 불법도 아니고 권력형 불법행위다. 오늘자 〈한겨레〉에서 정석구 논설위원실장은 이렇게 말하는데, 들을만하다.

모든 게 20~30년 전으로 되돌아 간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철저히 묵살되고, 그런 행위에는 반정부·반체제 책동이란 딱지가 붙는다. …

반체제란 말 그대로 기존의 정치·사회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

우리 헌법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명시돼 있다. 따라서, 반체제 또는 체제전복 활동은 민주공화정을 부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 정부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고 말한다.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를 부정하고, ‘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며,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의 반대자들이 ‘체제전복 세력’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 자체가 바로 민주공화정을 부정하는 ‘반체제 조직’이 아닌가.

정석구, 반체제와 반정부, 〈한겨레〉2009.2.17

권력기관이 나서서 법을 어기고, 법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일망타진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일제고사 선택권을 준 교사들이 대표적 예다. 이명박의 심복 공정택은 자신의 월권행위에 흠집을 낸 이 교사들을 중징계했다. 그래서 이명박을 위시한 이 정권은 반체제 정권이다.

이명박에 대한 비난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분들은 여기까지 보기 바란다. 다음 문단에서는 노무현을 검토하고 자본주의와 교육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피려고 한다. 난데없는 노무현 비판에 눈꼴이 시릴 수도 있고, 자본주의까지 들먹이며 교육 이야기를 해서 설득력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자. 나는 지금 같은 시점에 노무현가지고 입씨름할 생각은 없다. 어쨌든 우리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명박이다.

내신과 학력고사, 그리고 수능

오늘자 〈한겨레〉에는 또 재밌는 글이 실렸다. 이번에는 교육평론가 이범 씨의 말이다.

공교육을 살리려면 학교교육을 옹호하고 대입에서 내신 반영비율을 높여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학원 강의보다 더 주입식인 학교수업과, 수능보다 더 일차원적인 내신 시험문제들을 보고 나면, 이런 주장에 동의하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난다. 지금처럼 엉망인 내신교육에 눈감으면서 ‘공교육 지키기’ 운운하는 건 위선이다.

이범, 학원만도 못한 학교?, 〈한겨레〉 2009.2.17

이명박 정권은 ‘민주화’이래 사상 최고로 미친 정권이다. ‘자유화’ 이후 정치를 접한 세대들은 이명박 정권의 행태를 보면 현기증이 날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물론 양태는 많이 달랐다. 그러나 별로 다르지도 않았다. 모순된 두 말은 둘 다 사실이다.

2005년 5월. 그 때도 5월이었다. 노무현 정권이 내신등급제를 시행하자 고등학교 3년 내내 내신을 수능처럼 봐야 하는 것이냐며 학생들이 시위를 해야겠다고 문자를 돌렸다. 〈조선일보〉는 혈안이 돼 학생들을 막아섰다. 일선 학교에선 문자가 확산되는 걸 막았다. 어떻게 막았을까? 당연히 색출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일, 8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그리고 교사들도 800여 명이 모였다. 학생들을 지지해서? 아니, 학생들 잡으러. 미친 교사들이었다. 비상걸린 교육청이 교사들도 거리에 내몰았다. 물론, ‘자발적 색출분자’도 있었을 것이다.

노무현의 교육정책과 이명박의 교육정책, 달랐다. 노무현은 이명박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노무현은 이 땅의 ‘세련된 지배계급’을 대리해 행동했다.

노무현은 운동의 목소리 일부를 활용해 자기 식대로 뜯어고칠 줄 알았다. 그는 ‘공교육 정상화’ 논리를 받아들이는 척하며 사실은 입시경쟁에 손하나 대지 않았다. 이명박이 입시경쟁을 강화하려고 미친 질주를 하는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노무현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노무현을 별로 안 좋아하긴 한다. 그래도 이명박이 미친 짓을 할 때 노무현을 씹느라 세월을 보낼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니다.

다만, 노무현을 평가하면 이 사회 교육 시스템이 왜 이리 개판인가를 알 수 있어서 하는 말이다.

노무현, 진정성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세상에 기여하려 했다. 적어도 이명박보다는 기여하려고 하는 바가 넓었다고 본다.

그러나 노무현, 그는 아무리 좋게 쳐줘도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모르는 멍청이였다.

노무현은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노무현의 사회적 기반은 다계급적(多階級的)이다. 부르주아지(자본가 계급과 상층 중간 계급)의 자유주의적 일부와 자유주의적-포퓰리즘적 중간 계급 지식인들과 주요 시민단체 지도자들, 그리고 노동조합 일부 상근 간부(지도자)들이 그 주요 구성 부분들이다.

노무현의 노조 상근 간부 기반은 김금수ㆍ이원보ㆍ김영대ㆍ박태주 씨 등의 경우처럼 직접적 연계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민변이나 여성단체연합 등 온건 시민단체 지도자들의 정치적 중개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개혁국민정당(독일사민당 강령을 그대로 본떴음을 자부한다)이나 노사모 등의 중개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최일붕, 노무현 정권의 성격, 격주간〈다함께〉, 2003.7.12

그러나 노무현은 철저하게 이 체제의 논리를 수용하며 행동했다. 그 점에서 그는 이명박과 다를 게 없다. 다른 점이라면 이명박이 체제의 논리를 극적으로 수용해 완전히 막무가내라면, 노무현은 체제의 논리와 법이 상충할 때 살살 눈치를 봐가며 한다는 점이다.

체제의 논리

그렇다면 체제의 논리는 뭔가? 자본주의의 논리다. 자본주의의 논리는 뭔가? (자본주의가 나쁜 것에 좋은 말을 다 갖다붙여 좋은 말을 죄다 시궁창에 빠뜨렸는데 이 말 하나만은 어쩌지 못했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위주로 돌아가는 체제를 말한다. 자본을 위주로 돌아가는 체제는 뭔가? 돈세상이다. 즉, 자본주의의 논리는 돈의 논리다. “돈 위에 사람 없고, 사람보다 돈이 우선”인 논리.

근대 국민교육은 만인의 평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을 위해 태어났다. 자본을 위해 양질의 노동력을 확보해야 했다.

자본을 위해 고급인력을 충원해야 했다. 그래서 대학을 늘렸다. 1980년대 한국 대학이 폭증한 것은 산업구조 고도화가 한국 지배자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고급인력이 충분하다. 그래서 대학에 너무 많이 갈 필요가 없다. 정부는 대학 인원에 규제를 가하고 지원을 줄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학 당국 자신의 이해관계가 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대학 당국은 체제 전체에 반대하지 않으면서 살아남으려고 한다. 당국은 등록금을 올렸다. 돈이 많아야 경쟁에서 승리하기 쉬우므로.

학생과 부모들은 ‘고급 노동력’이 되는 편이 인생 살기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급 노동력’은 대학 서열에 의해 결정된다. 한편으로 대학 서열의 최상위권에 있는 대학들은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일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좁지만 가능성 큰 통로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입시에 매달렸다. 대학 문이 좁을 때도, 넓을 때도, 다시 좁아지기 시작할 때도, 사람들은 계속 여기 목을 맨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에 대응하는 하나의 ‘합리적’ 방식이다. 체제를 타파할 수 없다면, 체제에 잘 적응하는 편이 낫다. 보통은 그게 ‘정상’이다.(굳이 이 문단을 길게 쓴 건, 입시경쟁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미친 교육의 공범이라는 논리가 있어서다. 나는 그 논리에 반대한다.)

지배자들의 선택

예나 지금이나 지배자들은 자식들을 손쉽게 승진시키는 방법을 고안해 활용한다. 고려 때나 조선 때는 음서(아버지가 국가 고위관료면 나도 고위관료가 되는 제도)라는 노골적 제도가 있었다. 지금은? 교육이다.

흔히 교육을 계급 이동의 수단이라고 말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교육은 계급 재생산의 수단이다. 가끔씩 나오는 예외는 이를 포장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평준화보다는 비평준화가 낫다. 평준화는 지배자들이 교육을 통해 자식을 쉽게 승진시킬 기회 자체를 박탈한다. 비평준화는? 교육 때문에 드는 노력은 많지만 권력자의 자식들이 승진할 기회는 크다. 아무런 노력도 들일 수 없고, 자식의 신분을 보장할 방법이 없는 평준화, 참교육보다는 그래도 비평준화로 내자식 잘 되는 게 낫다. 이게 이 땅 지배계급의 합의된 생각인 듯하다.

그래서 노무현의 소심한 교육‘개혁’은 본질의 털끝하나 못 건드리고 되려 입시경쟁을 부추겼던 것이다. 공교육 정상화? 입시로 계급을 결정짓는 체제에서 기준이 내신이든 수능이든 무슨 상관인가? 문제는 상위권에 진입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버리는 헌신성이다. 물론, 총알은 많은 놈이 장땡이다.

《교육부의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책은 자유주의 정권의 교육‘개혁’의 본질에 대해 철저히 파헤친 책이다. 탐구를 하고픈 분들에게는 이 책을 추천한다.

핀란드 교육

그럼 핀란드는? 핀란드도 자본주의다. 프랑스는? 프랑스도 자본주의다. 두 자본주의 국가가 우리와는 사뭇 다른 교육을 하고 있음은 잘 알고 있다.

한 사회의 체제는 경제 체제라는 객관적 변수와 역사적 경험ㆍ계급 세력관계라는 주관적 변수에 의해 구체적으로 결정된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매우 유연한 체제다. 200년 전 영국에서 지배자들은 노동계급에 투표권을 주는 것은 멸망의 날이라고 날뛰었지만, 노동계급이 투표권을 갖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영국 지배자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없다. 태국의 미친 왕당파나 농민의 표 수를 줄여야 한다고 지껄인다.

핀란드와 프랑스의 높은 투쟁수준, 그 중에서도 교육을 중심으로 형성된 투쟁 수준이 두 사회의 교육제도를 완전히 바꾸었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자들은 교육이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심어두었을 것이다. 예컨대 프랑스는 그랑제꼴, 예나 등으로 불리는 엘리트 코스가 있다.

부족하지만 결론

사변적인 논리가 전개돼 피로감을 느꼈을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좀더 구체적으로 쓰고 싶지만 시간이 한이다. 어쨌든, 이 기회에 개괄적 논리 뼈대를 세웠으니, 나중에 논리를 좀더 구체적으로 다듬고 근거를 확충하겠다. 이 글은 그것을 위한 메모쯤으로 해 두자. 이상.

아, 읽을만한 글을 하나 링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