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 친구인 이원웅이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은 International Socialism에 실린 Michelangelo and human emancipation(존 몰리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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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누구나 아는 명사다. 미켈란젤로의 명성은 아리스토텔레스, 세익스피어, 괴테, 모차르트, 다빈치와 함께 어깨를 견준다. 인류 역사에서 로드 거상처럼 우뚝 솟아오른 그 명성은 언제 어디에서나 인정을 받는다.1 더군다나 미켈란젤로는 생전에 그런 명성을 누렸다. 당시 조르조 바자리(Giorgio Vasari)가 쓴 '예술가의 생애'를 슬쩍 봐도 알 수 있다. 거기서 미켈란젤로는 다 빈치보다 더 뛰어난 천재로 꼽힌다(다 빈치가 헬리콥터와 모나리자, 댄 브라운 덕분에 미켈란젤로를 약간 능가한다고 보는게 사실 더 공정한것 같다). 예술 역사 전문가들에겐 그렇지 않더라도, 더 넓은 문화 속에 있는 많은 이들은 미켈란젤로의 명성은 흠잡을데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이런 명성에는 여러가지가 섞여있다. 미켈란젤로는 끊없는 진부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TS 엘리엇은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의 한 구절로 그 상징을 영원히 굳혀버렸다. "여자들이 방에 드나들며 미켈란젤로에 대해 말한다." 남자들은 뭘 하는지 쓰려는걸 단념케 할 만한 구절이다. 한편 어빙 스톤의 소설에서 미켈란젤로는 반 고흐처럼 수모를 겪는 인물로 나온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며 찰튼 헤스턴이 미켈란젤로를, 그에 맞선 교황은 렉스 해리슨이 연기했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 키치계의 환영을 받았는데, 이것은 아방가르드에 대한 거부와 상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60년대부터 그림을 그려온 나이든 내 친구는 미켈란젤로를 너무 과장을 많이해서 싫어하며, 베로키오(Verrocchio)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로버트 휴즈(Robert Hughes)에 따르면 바넷 뉴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도 한다. "미켈란젤로와 말싸움했던가?" 그러자 휴즈는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글쎄, 안타깝지만 넌 졌어."2
엘리엇이 싯구로 경고했고, 그리고 이미 많은 글이 나온바 있지만 나는 미켈란젤로의 확고한 명성을 파헤치고자 한다. 그 명성에 도전하거나 그것을 해치려는게 아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름 값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 명성은 시대를 초월한 것이 아니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역사적인 근거가 있다. 나는 이 점을 보이려는 것이다. 이 글은 다음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
- 미켈란젤로의 명성과 작품은 성격이 어떠하며, 그런 성격이 나타난 원인은 무엇인가?
-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역사의 관련성은 무엇인가?
- 미켈란제로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역사에 대한 그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나?
여기에 답하다 보면 예술을 "해석하는", 즉 바라보는 특정한 방법에 이른다. 물론 이 물음에 완전히 답하려 하진 않을 것이다. 하나만 제대로 다뤄도 책이 하나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더 풍부한 논의를 하는 바탕이 되길 바란다.
"천재"의 막다른 골목
이야기를 시작할 거리가 풍부하지는 않다. 르네상스기에 미켈란젤로가 남긴 업적은 신이 내린 영감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을 먼저 검토해보자. 이를 사람들이 얼마나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바자리는 그런 주장을 좀 더 자세히 펼친다.
선택된 근면한 자들은 지오토(Giotto)와 추종자들이 비춘 빛을 따라갔다. 타고난 운명과 균형잡힌 재치로 자신의 재능을 이 세상에 보여주려 애썼다. 만물에 깃든 자연의 위대함을 흉내내 높은 경지에 이른 앎을 얻으려 했다. 그러는 사이 하늘의 위대한 지배자가 세상을 굽어보았더니 이들은 결실 없는 헛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신은 인간이 진리에 이르기보다는 어둠에 가까워진 것을 보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인간이 잘못을 면하게 하려고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천재를 각 예술 분야에 보냈다. 그리하여 혼자서 완벽한 선과 그림자를 선보이게 했다. 천재는 자신의 회화를 구제하고, 조각에서 뛰어난 판단력을 보이며, 건축에선 건축물 안에서 사는게 편안하고, 안전하며, 건강하고, 즐거우며, 치우침 없고, 다양한 장식들로 풍부하도록 해야했다. 신은 옳고 그름을 구별할 능력과 달콤한 싯구를 뽑는 영감을 천재에게 주었다. 그래서 온 세상이 천재의 삶과 작품을 보고, 마치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듯한 천재의 행동을 보고 놀라워하도록 했다.3
그러나 세상 일에 간섭하는 신을 믿지 않는다면 이런 주장은 별 소용이 없다(그리고 그런 신을 믿는다면 앞으로 나올 내용은 마찬가지로 쓸모 없을 것이다). 350년 후에도 분석 수준은 크게 나아진 바 없다.
영감과 불멸의 불꽃을 주고 신이 세상에 내려보낸 위대한 예술가는 아무데도 얽매이지 않는다. ... 부드럽고 침착하게 완벽을 추구하는 ... 라파엘로와는 달리 ... 미켈란젤로는 심오하고, 난폭하며, 위대하며, 열정으로 가득찬 종류의 천재였다.4
20세기 후반 사람인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신이 끼어들게 할 수도 없었고, 그렇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천재 앞에선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16세기 무렵은 전성기Cinquecento라고 한다. 이탈리아 예술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눈부신 시기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과 티티앙, Correggio와 Giorgione의 시기였다. 북쪽에는 뒤러와 홀바인이 있었고, 그 외에도 여러 위대한 예술가가 시대를 풍미했다. 같은 때에 대가들이 이토록 많이 탄생한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을 들어본 적은 거의 없을 것이다. 천재의 존재는 설명할 수 없다. 그냥 그런 상황을 즐기는 편이 낫다.5
미켈란젤로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는게 쉽진 않더라도, 그가 남긴 업적이 어떤 성격인가에 답하는 것은 좀더 쉬운것 같다. 다시 바자리의 글을 들춰보면, 미켈란젤로의 업적에 대해서는 종교적인 신비주의가 아니라 꽤 명료한 기술적 기준을 제시함을 알 수 있다.
디자인이란 자연에 깃든 가장 아름다운 것을 조각이든 회화든 모든 형태로 모방하는 것이다. 디자인은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을 작품의 설계나 그림으로 그대로 옮길 수 있는 솜씨에 달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은 가장 아름다운 것을 끊임없이 베껴야 얻을 수 있다. ...
지오토나 앞서 산 어떤 장인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 그러나 고금을 불문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화가는 바로 신이 내려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다. 미켈란젤로는 세 분야 모두에서 모두를 능가했다.6
이 주장을 뜯어보면, 세가지 주장으로 나눌 수 있다.
- 미켈란젤로는 뛰어난 솜씨 때문에 위대할 수 있었다.
- 그 솜씨란 고전적인 "모방"(mimesis), 즉 자연을 정확히 베끼는 능력이다.
- 핵심은 아름다운 것을 "베끼는" 것이다.
곰브리치도 이런 관점을 따른다. '서양미술사'에서 15세기 초(브루넬레스키, 마사치오, 도나텔로, 반 아이크 등)를 다룬 장에 "현실 정복"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16세기 초(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를 다룬 장에는 "조화를 얻다"라는 제목을 붙인걸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곰브리치의 관점은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예술사가들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주장과 이야기가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당시 예술의 발전과 특히 미켈란젤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옳은 부분도 있다. 내가 보기에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 다비드 상이나 빈콜리에 있는 산 피에트로 사원의 모세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은 없다. 이 거상들은 대리석 덩어리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든 것이다. 그 작품을 만들어낸 솜씨의 수준은 입을 벌리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과연 미켈란젤로보다 훌륭하게 돌을 깎아낼 인간이 있을까? 그럼에도 앞서 살핀 주장을 의심해보고, 그런 주장으로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릴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일단 미켈란젤로가 원하는대로 돌을 깎거나 그림을 그리는 엄청난 솜씨가 과연 "현실"을 표현하거나 자연을 "따라하는" 솜씨인지 의심해보자. 이 문제에 대한 르네상스 시기의 관점은 서구 문화에서 지배적이었고, 지금도 사람들은 자연주의(예를 들어 1인칭 관점이나, 입체적인 명암)를 요구하는 관점에서 일부 옳은 점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여러 모로 자연과 닮지 않았다는 것을 "간과"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예컨대 다비드 상은 키가 거의 5.5미터나 되는 돌덩어리다. 크기나 색깔, 질감, 이동성 등 어느 모로 보나 이 석상은 기원전 6세기의 양치기 소년과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 게다가 우린 다윗이 진짜로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며, 다윗의 존재 조차도 신화일 가능성이 높다. 아담 창조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어째서 "자연주의"이며, "현실"을 표현한단 말인가? 아담의 근육과 신의 수염도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장 보들리야르가 말한 초현실을 들먹여 본다면, 지시하는 바가 존재하지 않는 미켈란젤로가 만든 시뮬라크룸의 시뮬라크룸은 CNN과 걸프 전을 능가할 것이다.
자연주의라는 말을 늘상 쓰는 식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미켈란젤로의 작품 활동이 그린 궤적과 그의 입장을 자연주의로 설명하긴 어렵다. 88세로 죽음의 침상에 누운 미켈란젤로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제야 내 분야의 ABC를 배우려니 죽는구나."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나이가 들 수록 자연주의에서 말하는 "기술"에서 멀어지고, "더 자유롭고" "표현적인" 조각을 했다. 같은 소재를 다룬 초기 작품과 후기 작품을 비교해보라. 20대일 때 제작한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피에타와 80대일 때 제작한 피렌체 두오모 박물관에 있는 피에타를 비교해보자.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피에타는 뛰어난 기교를 보여준다. 마리아의 옷에 생긴 주름과 예수의 손에 돋은 핏줄을 다듬어낸 능력은 정말 놀랍다. 피렌체 두오모 박물관에 있는 것은 거칠게 깎아냈으며, "미완성"이다. 기이하게도 예수에겐 오른쪽 다리가 없다. 그러나 내 눈에는 피렌체 두오모 박물관에 있는 것이 더 호소력이 있으며,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것을 훨씬 능가한다. 미켈란젤로가 남긴 업적이 그저 기교와 이른바 자연주의에 기댄 것이었다면, 미켈란젤로는 렘브란트나 세익스피어, 바흐가 아닌 홀바인이나 홀스 정도와 어깨를 견줬을 것이다.
이처럼 미켈란젤로가 남긴 업적이 기술을 부리는 솜씨로 가능했다고 보는 관점은 빈틈 없고 객관적인것 같지만, 사실은 주관적이고 허점이 많다. 대신 미켈란젤로가, 혹은 그의 작품이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똑바로 살펴보자. 많은 예술사가와 비평가는 미켈란젤로를 대하며, 더 나아가 예술 일반을 대하며 그렇게 하길 부끄러워한다. 이해할만한 이유가 있긴 하다. 그러나 앞뒤 돌아보지 않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바보들도 있다. 예를 들어 롤프 쇼트(Rolf Schott)는 미켈란젤로에 관한 논문에서 이렇게 쓴다.
매일 살아가며 겪는 압박감 때문에 요즘 사람들은 인류의 신성한 기원을 잊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이 세상이 잊은것에 대해 말한다. 인간의 존재와 인간의 형상이 지닌 신비가 일으키는 경이감을 말이다.
예술가로서 미켈란젤로는 개인이 아니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미켈란젤로 개인이나 그가 처한 환경에 대해 아무 얘기도 해주지 않는다.7
미켈란젤로에 대한 해석은 제쳐두더라도, 이 글은 말이 안된다. 한 때는 "세상" [사람들이] "인간의 존재와 인간의 형상이 지닌 신비"에서 "경이감"을 느꼈다고 치자. 그럼 언제부터 그랬고, 언제부터 그러지 않았단 말인가? 미켈란젤로가 작품으로 나타낸 르네상스 전성기일까? 경이감을 잊은건 요즘 뿐인가? 그걸 잊은게 진짜로 "매일 살아가며 겪는 압박감" 때문인가?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미켈란젤로 개인이나 그가 처한 환경에 대해 아무 얘기도 해주지 않는다"는건 말이 되는가?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설사 남자의 몸에 매우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 작품이 말해주는 유일한 바라 해도, 이는 매우 중요하다.
쇼트(와 곰브리치, 시몬즈(Symonds))를 굳이 인용한 한가지 이유가 있다. 고상한척 하지만 사실은 공허한 그런 글들은 우리 문화에서 미켈란젤로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를 "자연주의" 예술가로 보는 것도 문제지만, 그를 종교적인 예술가 취급하는 것도 큰 문제를 낳는다. 미켈란젤로는 당연히 신을 "믿었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게다가 많은 작품들은 교회가 위촉한 것이었으며, 주제가 종교였다. 이 점은 그 시대에 그 곳에서 예술을 하면서 따라온 것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켈란젤로가 작품을 만들게한 원동력이 순전히 고상한 신앙심이라고 볼 순 없다. 마치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가 신앙심 가득한 작품이라고 볼 수 없는것처럼 말이다. 내가 보기엔 어떤 예술가들은 마르크스의 통찰을 통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거나, 그런 통찰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종교를 만들지,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게 아니다", "속세의 가족이 ... 신성 가족의 비밀이다"라는 통찰을 한바 있다.
다비드 상을 보자. 다비드 상은 성경에 기반한 것이지만, 그 작품을 만든 동기는 철저히 세속적이고 "정치적"이다. 이 작품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위원회(일종의 토목 공사 위원회)가 1501년 위촉한 것이다. 이 작품은 새로 선 공화국 정부를가 메디치가의 지배자들을 축출하고 밀라노가 거점인 스포르차가와 로마 교황청에서 독립한 것을 축하하는 것이다. 그런만큼 다비드 상이 상징하는 바는 뚜렷하다. "더 깊은", 보편적인 뜻 또한 품고 있어 마음을 울린다. 왜냐면 이 작품은 인본주의적인 입장에서 "인간"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좀 더 설명해야하며, 잠시 후에 다루겠다.)
이제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죽어가는 포로'를 보자. 이 작품은 '죽어가는 노예'라고 하기도 한다. 제목은 미켈란젤로 사후에 붙은 것이다. 작품만 보고선 젊은 남자가 포로인지 노예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성적인 은유("사랑의 노예")가 있다는 점만 알 수 있다. '작은 죽음'이라 하는 오르가즘이 아니라면, 이 남자가 죽어가는지도 사실 알 수 없다. 미켈란젤로 전문가로 인정받는 톨네이(Charles de Tolnay)는 이 남자가 "잠을 떨치고 있는 꿈꾸는 청년"이라고 말했다. 살라(Charles Sala)는 동의하며 톨네이의 말을 이렇게 다듬는다. "이 사람은 죽어가는게 아니다. 마치 꿈 속에 빠져있는 듯하다. ... 20대 접어든 청년의 깨어나지 않은 관능과 왜 그런지 알지 못한채 묶여있는 포로의 욕망 사이 어디쯤에 있다."8
너무 벗어났다. 눈앞에 있는걸 그대로 보지 않는 예술사가들의 능력에 나는 끊임없이 놀란다. 이 작품은 동성애를 다룬 것이 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동성애가 다는 아니지만, 이 작품을 만든 추동력은 명백히 동성애다. 금기를 벗어 던지고, 400년된 위선을 벗기면 미켈란젤로의 작품 전체를 추동하는건 바로 동성애라는게 명백히 드러난다. 많은 작품의 소재가 남성의 벗은 몸일 뿐 아니라, 남성들이 무리지어 성교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는 작품들도 많다('켄타우로스 전투'나 '최후의 심판'의 일부가 그러하다). 겉보기에는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배경이 되는 이야기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남성 누드가 등장하는 작품들도 있다. '신성 가족'의 배경에는 남자 넷이 벗은채로 서있으며, 시스틴 성당의 천장의 틈에는 20명 이상이 있다. 이 짧은 글에서 동성애가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어떤 구실을 하는지 입증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사례를 통해 종교적인 주제가 종교적인 내용과 대응하거나, 그런 내용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아무리 예술가가 독실한 신자라 해도, 그가 만든 작품은 철저히 세속적인 것을 표현하는 수단일 수 있다.
르네상스의 혁명
그럼 이제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이런게 아니다'에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이런 것이다'로 빨리 넘어가겠다. 그런 말을 하려면 미켈란젤로를 그가 살던 시대와 관련지어 봐야한다. '미켈란젤로가 살던 시대'라 함은 그때 벌어진 어떤 일이라기보다는 더 넓고 깊은, 그때 작용하던 사회적 힘을 말한다. 어떤 작품들은 특정한 사건 때문에 생겨났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그런 예다. 하지만 피카소의 입체주의나 그가 그림을 그리고 세상을 나타낸 방식은 제국주의 국면에 들어선 자본주의의 사회 관계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 점은 존 버거가 저서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와 '큐비즘의 순간'이라는 글에서 입증했다. 리고(Hyacinth Rigaud)가 루이 14세를 그렸을 때, 그 화가는 단지 태양왕의 생김새와 성격을 그린게 아니라 절대 왕정을 이루는 사회 제도를 그린 것이다. 한편 미켈란젤로가 살았던 시대와, 그 때 작용하던 사회적 힘은 마르크스주의로, 역사유물론으로 이해해야 한다.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발전과 그것이 드러나는 계급 투쟁에서 출발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 이론이야말로, 모든 예술가들, 특히 위대한 예술가들이 반응하는, 사회에서 작용하는 심층적 힘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이 방법론은 환원주의나 경제 결정론이 아니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겠다. 꼭 미켈란젤로가 아니어도 예술가가 나름대로 살면서 얻은 창의력이나 독특함, 꿈을 무시해선 안된다. 예술가는 특히 계급의 이해관계나 이데올로기를 도구로 보아선 안된다(알튀세르주의자인 Nicos Hadjinicolaou가 쓴 '예술사와 계급투쟁'은 그런 관점을 내세우지만, 그런 관점은 마르크스주의나 내가 아는 예술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예술가는 자기도 모르게 사회상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스스로, 그것도 비판적으로 사회에 반응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에 반응하는지는 분석해야 아는 것이다. 뭉뚱그려 말하면 위대한 예술가는 겉모습에 연연하기 보다는, 그 시대의 심층에 있는 사회 세력을 파헤치려 한다.
미켈란젤로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프레데릭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 서문을 인용하겠다. 엉뚱해 보일 수도 있겠다. 엥겔스가 이 글에서 다루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현대과학의 탄생이다. 그럼에도 이 글은 우리에게 매우 유용하다.
현대 자연 과학의 기원은 격동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인들은 그 시기를 개혁기 (Reformation)라고 했다. 이 시기엔 모든 독일인들이 혼란을 겪었다. 프랑스 인들은 그 시기를 르네상스라고 하며, 이탈리아인들은 전성기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이름이든 이 시기를 제대로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 시기는 15세기 후반부터 시작했다. 도시 시민들에게 지지받는 왕들은 봉건 귀족의 권력을 분쇄했고, 절대 왕정을 세웠다. 절대 왕정은 기본적으로 민족성을 바탕으로 했다. 이 민족성을 바탕으로 현대 유럽 국가와 현대 부르주아 사회가 발전했다.
무너진 비잔틴 제국에서, 로마의 폐허 속에 서있던 오래된 인물상에 있던 글들을 건져냈다. 그 글에서 서방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를, 고대 그리스의 세계를 보고 놀라워 했다. 그 빛나는 모습은 중세의 유령을 몰아냈다. 이탈리아에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예술이 화려하게 꽃피었다. 이탈리아 예술은 고대적 모습을 고스란히 이끌어 냈으며, 그 화려함은 여느 때와 견줄 바가 아니었다. 이탈리와 프랑스, 독일에서는 새로운 문학이, 처음으로 근대 문학이 부흥했다. 영국과 스페인 문학도 곧 이어 고전 시대를 맞았다. ...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던 교회의 권력은 산산히 흩어졌다. 프로테스탄티즘을 받아들인 독일계 사람 다수는 기존 교회를 내던져버렸다. 한편 라틴계에서도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던 활기찬 이들은 아랍 문화를 차용하기도 했고, 새로 알게된 그리스 철학에서 양분을 얻었다. 이렇게 뿌리를 내린 그들은 18세기 유물론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이는 인류가 겪은 가장 큰 진보였다. 시대는 거인을 원했고, 거인을 만들었다. 뛰어난 사고력과 열정, 됨됨이를 지니고 무엇이든 배우려는 거인들을 말이다. 현대 부르주아지의 지배력을 다진 사람들은 부르주아라서 어쩔 수 없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을 가졌다. 그러나 모험을 추구하는 당시 분위기 때문에 이들은 자극을 받았다. 당시 중요한 사람들이라면 모두 먼 곳까지 가봤으며, 네다섯 언어에 통달했고, 다양한 분야에 능통했다. 다 빈치는 위대한 화가였지만, 위대한 수학자이자, 위대한 기술자였다. ... 알브레히트 뒤러는 화가이자, 조판사, 조각가, 건축가였고, 요새의 체계를 발명했다. ... 마키아벨리는 정치인이자, 역사가, 시인이었고, 근대 들어 처음으로 돋보이는 군사학자이기도 했다. 루터는 부패로 썩은 교회를 깨끗히 했고, 독일어도 깨끗이 했다. ... 이런 거장들이 등장한 때에는 아직 노동 분업이라는 굴레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후계자들처럼 시야가 좁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 거장들이 다른 시기와 진짜로 다른 점은 바로 시대 한 복판에서 활동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모두들 편을 들고 싸웠다. 어떤 이들은 말과 글로 싸웠고, 어떤 이들은 칼로 싸웠으며, 많은 이가 둘 모두를 했다. 꽉 차있고 쌩쌩한 품이 이들을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었다.9
위 글은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미켈란젤로와 딱 맞아떨어진다. 미켈란젤로도 1529년 요새를 지었다는 점도 그렇다. 위 글에서 핵심은 이렇다.
- 르네상스는 자본주의가 탄생하는 과정의 일부였다. 더 꼼꼼히 말하자면 르네상스는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갈 때 벌어진 일이었다.
-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은 길었으며, 거이에는 여러 국가가 뒤얽혔다(즉 국가마다 따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자본주의 사회 관계는 처음에 봉건 사회 안에서 천천히 발전했다. 발전은 봉건 사회의 틈새에서,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중세 도시에서 벌어졌다. 자본주의 사회 관계를 퍼뜨린 이들은 부르주아지였다(혹은 시민이나 "도시민"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진짜로 중간 계급이었다. 지배 계급인 봉건 귀족의 지배를 받았지만, 농민, 수공업자, 새로운 노동계급, 즉 임노동자보다 높았다. 부르주아지는 경제력을 키웠고, 나름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정치 권력, 즉 국가 권력을 손에 넣은 것으 그 뒤의 일이다. 부르주아지의 권력과 귀족의 권력은 꽤 오래 팽팽히 맞섰다. 이 시기에 절대 왕정이 떠올랐다. 절대 왕정은 두 계급 위에 올라서서 서로 싸우도록 했지만, 끝내 옛 봉건 제도를 지키려했다. 부르주아지는 몇세기 동안 수많은 투쟁과 혁명, 전쟁에서 승리와 패배, 전진과 후퇴를 겪고 나서야 국가 권력을 쥐고, 완전한 자본주의 국가를 세웠다. 가장 중요한 승리는 네덜란드 혁명(1569-1609)과 네덜란드 공화국이 16세기 말에 들어선 사건, 영국 혁명(1642-7), 미국혁명(1774-6), 프랑스 혁명(1789-93)이다.
프랑스 혁명과 당시 영국에서 벌어진 산업 혁명은 결정적이었다. 이후 20세기까지 말끔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그때부터 부르주아 계급은 세계를 지배했다고 보면 된다.
이런 이야기의 첫 부분에서 피렌체가 어떤 구실을 했는지에 대해선 프레데릭 안탈(Frederick Antal)이 자세히 기록한바 있다. 다음은 고전이 된 '피렌체 회화와 그 사회적 배경'(Florentine Painting and its Social Background)의 첫 장이다.
피렌체의 엄청난 경제력은 ... 주로 12세기에 성장했고, 13, 14세기에도 계속 커졌다. 그 규모는 이탈리아나 유럽 전체에서 견줄데가 없었다. 엄청난 경제를 뒷받침하는 주춧돌은 직물 산업, 직물과 다른 생산물 교역, 은행[이었다] ... 이런 사업에서 상품을 소비자에게 파는 사람은 이제 장인이 아니라 기업가였다. ... 피렌체의 산업은, 특히 모직 산업, 여기에 엮인 국제 무역은 전체 중세 역사를 통틀어 볼때 가장 중요한, 자본주의 초기 산업이었다. ... 바로 그 피렌체의 시민은 세계에서 가장 큰 사업이자 상인이었으며, 은행가이기도 했다. 10
이는 르네상스 초기와 절정기 모두를 뒷받침한 경제였다. 눈부신 부에 예술의 "황금기"가 따르는 일은 예술사에서 흔히 벌어진다. 피렌체 이후엔 베니스가 그랬으며, 16세기 말과 17세기에는 앤트워프와 암스테르담이 그랬다.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는 프랑스가 그랬으며, 2차대전 이후에는 뉴욕이 그랬다. 비록 크게 두드러지진 않았지만 1980-90년대 런던도 그랬다.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새로운 예술 문화는 처음에 이탈리아에 등장했다. 왜냐면 이 나라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전체 서구를 이끌던 나라였고, 경제 생활이 부흥한 곳이었으며, 십자군에게 자금과 물자를 지원하는 기지가 있던 곳이고, 중세 길드의 이상에 맞서 자유 경쟁이 처음으로 발전한 곳이며, 유럽 은행 체계가 처음으로 생긴 곳이고, 도시 중간 계급이 유럽에서 가장 일찍 해방된 곳이기 때문이다.11
치마부에(Cimabue), 지오토, 마사치오, 우첼로(Ucello), 도나텔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보티첼리(Botticelli) 등의 예술과 이러한 경제 발전의 연관성을 자세히 다루는 것은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흔히 나타나는 특징은 집어서 말할 수 있다. 14, 15세기에 나온 작품들이 3차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림 하나 하나를, 앞서 언급한 예술가들을 한명 한명 훑어보면 점점 입체성이 발전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입체성을 '얻는다'거나 '다진다'고 말하고싶다. 액자 안에서 깊이감이 느껴지는 그 공간 안에서 화가들은, 그 안에서 도시나 시골의 풍경, 물체, 무엇보다도 인간의 행동과 성품을 묘사했다. 이들의 작품은 "자유롭고 흠잡을데 없으며 ... 우아하고 고상한", 밝은 예술 작품이었다. 이런 기품은 인본주의 철학이 부흥하는데 밑거름이 됐다12. 이런 과정에는 분명 다 빈치, 라파엘, 초기 미켈란젤로의 작품도 엮여있다.
자본주의 초기에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속한 중간계급이나 중간계급 하층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탄생하는 과정을 인간이 더 자유로워지고, 봉건적 미신과 금지, 제약에서 벗어나 잠재력을 해방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미켈란젤로가 남긴 다비드 상과 '아담의 창조'는 유럽 역사에서 가장 뚜렷하게 이를 표현한다.
다비드 상은 정치적 자유를 숨김없이 찬양하는 작품을 만들어 달라는 위촉을 받고 만든 것이라고 앞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다비드 상은 더 포괄적으로, 즉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읽힌다. 마치 피카소는 프랑코의 전쟁 범죄에 분노해서 '게르니카'를 그렸지만, 그 그림은 전쟁 일반에 대한 분노로 읽히는 것처럼 말이다. "완벽한" 몸과 엄청난 크기를 보면 다비드 상이 무엇인가를 기념하려고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미켈란젤로보다 앞서 살았던 도나텔로나 베로치오(Verocchio)도 다비드 상을 조각했는데, 거기엔 골리앗의 머리가 발치에 있어서 골리앗의 패배가 함께 드러난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다비드는 골리앗과 싸우기 전의 모습이다. 다윗이 이마를 찡그린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명운이 달린 싸움을 내다보는 작품이다.
게다가 '다비드'의 비례는 "완벽"하지 않다. 머리와 손, 특히 돌을 쥔 오른손은 약간 크다. 그래서 다윗은 영리해 보이면서도 아둔해 보이고, 능동적으로 보이면서도 욕망의 대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다비드 상이 기념하는 것은 지금 그대로의 "인간"이 아니라, 그가 앞으로 이룰 수 있는 이상이다. 그람시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이며, 이것은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는가, '스스로를 만'들 수 있는가, 자기 나름대로 삶을 만들 수 있는가라는 물음과 같다."13
'아담의 창조'는 신이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주인공은 신이 아니라 아담이다. 사실 아담은 시스틴 성당 천장 전체에서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것은 인간을 앞에두는 창조다. '아담의 창조'가 그려진 판은 다른 판들을 압도한다. 눈으로 보기에도 그렇고 명성도 그렇다. 이것은 판의 내용(창조의 "순간"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고, 이 판의 많은 부분이 하늘을 나타낸 것이라 가장 밝고, 약간 대칭적으로 구성된 형상이 가장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약간 대칭적인 형상은 성경에 나오는 신, 즉 자신의 모습을 본따 인간을 만들었다는 신이라는 개념에 숨겨진 다른 뜻, 다시 말해 거꾸로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본따 신을 만들었다는 유물론자들의 주장(포이에르바하가, 다음엔 마르크스가 그랬다)을 넌지시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스스로를 쟁취하지 못한, 스스로를 이미 잃어버린" 인간이 신을 만든다고 말했다. 인간이 만든 신은 그가 이룰 수도 있었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과 꿈이다. 신, 즉 미켈란젤로는 인간을 한창 때인 젊은이로 만들었다. 인간, 즉 미켈란젤로는 신을 현명하고 자비로운 노인으로 만들었다.
이 그림은 어렵지 않게 동성애와 연결해서 읽을 수 있다. 그림 속 신과 아담은 서로를 동경한다. 그러나 동성애로 이어지는 이 부분이 그림을 더 "보편적"으로 보이게 하기도 한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남자의 모습은 인류를 "나타낸 것"이다(나는 지금까지 토 안달고 이 점을 그저 살펴보기만 했다). 이토록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이는 당연한 것이었고, 시간이 훌쩍 지난 1970년대까지 언제 어디서나 그랬다. 우리가 쓰는 언어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담을 볼 때마다 나는 미켈란젤로가 동성애자여서 그림을 "부드럽게" 그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켈란젤로는 마초가 아니라 아름다운 남자를 그린다.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노예는 노예 주인보다 자유롭다. 그리고 인류는 경멸받는 동성애자로 표현된다.
꽝 하고 닫히는 역사의 문
시스틴 천정벽화에서 눈을 돌리고, 재단 뒤의 벽을 보면 '최후의 심판'을 보자. 갑자기 다른 감정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천장에 있는 프레스코는 다 빈치나 지오토와 마찬가지로 인본주의적인 밝은 전망을 보여준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은 어마어마한 괴로움으로 가득찬 작품이다. 예수가 천국으로 올려보내는 사람들이 그려진 윗 부분을 빼면, 끝없는 즐거움 따위를 그린 부분은 없다. 나머지 부분은 저주받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대부분 정신적인)을 그린 것이다. 하우저는 이렇게 쓴다.
이 그림은 아름다움과 완벽함, 힘과 젊음을 기념하지 않는다. 혼란과 절망, 르네상스를 갑자기 집어삼키려는 혼돈에서 구원해 달라는 절규로 가득찼다. ...
'최후의 심판'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며, 중세에 나온 아름다움은 없고 감정만 드러내는 예술로 되돌아가는 첫 걸작이다.14
'최후의 심판'만 그런게 아니다. 이후 나온 '성바오로의 개종'이나 '십자가에 처형되는 성 베드로', 플로렌틴에 있는 '피에타'와 마지막 작품인 론다니니에 있는 '피에타'도 분위기가 우울하고 비극적이다. 르네상스의 잣대로 보면 이 작품들은 흠이 많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그리지도 않았으며, "완벽함"이나 "조화"도 없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가장 훌륭한 작품이다. 세익스피어가 쓴 '리어왕'이나 '템페스트', 렘브란트가 그린 '유대인 신부'나 말년의 자화상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문제는 왜 분위기가 이토록 확 바뀌었냐다. 예술사를 예술가 개인의 삶으로만 접근하는 사람에겐 확실한 답이 있다. 노년이 시작되고 죽음이 가까워 졌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엔 합리적인 측면이 있다. 특히 론다니니에 있는 '피에타'를 설명할 때 그렇다. 이 작품은 그가 죽을때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왜냐면 하우저가 보여주듯이 미켈란젤로의 화풍이 변한 것은 이탈리아와 넓게는 유럽 전체 예술에서 나타난 흐름, 즉 매너리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변화를 설명하려면 다시 사회와 역사로 눈을 돌려야 한다15
시스틴 천정화(1508-12)와 최후의 심판(1535-41)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는가? 분명 많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가 여럿 죽었다. 보티첼리, 다 빈치, 델 사르토(del Sarto), 지오르지오네(Giorgione), 지오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라파엘, 코페지오(Corregio)가 죽었고, 이탈리에 밖에선 홀바인 뒤러, 그륀발트(Grünewald), 보쉬(Bosch)가 죽었다. 1512년 추기경 지오반니 데 메디치는 교황이 거느린 군대의 도움을 받아 피렌체에서 권력을 탈환했다. 이로써 피에로 소데리니(Piero Soderini)(그리고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통치하던 민주공화국의 시기는 끝났다. 그런데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찰스 5세가 거느린 합스부르크 군대가 로마를 함락하고 적군 수천명을 처형한 뒤 도시를 약탈했다.
피렌체 시민들은 다시 메디치가를 몰아내고 공화국을 다시 세울 기회를 붙잡았다(첫 기회는 1494년에 있었다). 미켈란젤로도 이들을 지지했고, 1529년에는 요새를 설계해 달라는 부탁을 승낙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찰스 5세와 협상을 해서 찰스 5세가 거느린 군대가 피렌체를 탈환하면, 도시를 다시 메디치가에게 돌려주도록 했다. 1533년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는 피렌체 공작이 되었고, 공화국은 멸망했으며, 그후 200년동안 메디치가가 권력을 세습했다. 로마가 약탈당하고 피렌체가 함락되자 르네상스는 순식간에 무너졌다(그런점에서 베니스에 있던 티티앙은 예외적이다).
이탈리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1517년 루터는 비텐부르크에서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1525년 독일 농민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루터는 귀족 편에 서서 자신이 불러일으킨 농민 반란을 무참히 짓밟았다. 종교개혁에 맞서 반종교개혁이 있었다. 인본주의는 빛을 잃었다. 교황 바울 3세는 종교재판을 부활시켰고(1542) 프로테스탄트의 위협을 물리치려고 트렌트 공의회를 소집했다(1545). 콜럼버스 이후 아메리카 대륙이 열리고, 비잔티 제국이 무너지고 오토만 제국이 지중해 동부를 넘볼 동안, 유럽의 경제적 중심지는 지중해에서 북서쪽과 대서양 연안으로 옮겨졌다.
당시 예술의 변화를 이해하려면 이런 일들을 그냥 지나쳐선 안된다. 피렌체와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자본주의를 개척했기 때문에 르네상스의 경제적, 사회적 바탕이 마련됐다는 점을 기억하라. 그리고 이탈리아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앞서가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는 점을 떠올려보라. 이탈리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낳지 못했고, 성숙한 자본주의 국가를 만들지도 못했으며,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국민들을 뭉치게 하려면 있어야 한다고 말한 "지도자"도 찾아내지 못했다.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그 결과 몇 세기 동안 문화가 쇠퇴했다. 지오토와 다 빈치, 미켈란젤로는 카나텔로(Canaletto)와 카노바(Canova)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반면 네덜란드와 영국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됐다.
16세기 초는 이탈리아 역사의 전환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 때가 독일 역사에서도 따라서 유럽과 세계사에서도 전환점이라고 설명한다. 그 때는 역사의 문이 조금씩 열리고 찬란한 미래가 보이다가 그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 때 쯤 쾅 닫히는 시기였다. 마치 러시아 혁명이 싹틔운 희망이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이라는 악몽으로 짓밟히고 사라지는 1920, 30년대처럼 말이다.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들은 근대 초기에, 빅토르 세르쥬의 표현을 빌면 "세기의 한 밤 중"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겨우 20년이 지나고 몇 백마일 바깥에서 다시 거대한 투쟁의 물결이, 봉건제에 맞선 부르주아 계급의 투쟁이 일어났다. 네덜란드 혁명은 미켈란젤로가 죽은지 2년 후에 벌어졌다. 그러나 미켈란젤로 뿐 아니라 그 누구도 당시에는 그렇게 될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역사를 미켈란젤로가 얼마나 알았으며, 그 역사가 작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분명 앞에 썼던 말(봉건주의, 자본주의, 부르주아 계급 등)로 역사를 이해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분석은 마르크스만 할 수 있다. 게다가 미켈란젤로는 직업 예술가였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나 교황의 위촉에 기대서 먹고 살고 작업을 계속 했다. 목숨을 지키려면 말을 가려해야 했고, 사과를 하고 작업을 중단해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어느 편에 공감했는지 우리는 안다.
젊은 미켈란젤로는 사보나롤라(Savonarola)에 동조했다. 사보나롤라는 도미니크 수도사 였으며 1494년부터 피렌체를 이끈 인기있는 민주주의 옹호자였다. 교황과 메디치가는 사보나롤라를 파면했고, 1498년 화형했다. 미켈란젤로는 자기를 부리는 메디치가와 교황 쪽 사람들과 종종 부딪혔으며, 1527년 피렌체 공화국을 지지했다. 메디치가가 권력을 되찾자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를 떠났다. 나이가 든 미켈란젤로는 로마에 있는 비토리아 콜로나(Vittoria Colonna)와 "정신적인" 우정을 맺었다. 둘은 교황청에게 이단으로 찍힐법한 "루터"식 생각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만큼 미켈란젤로는 정치적, 도덕적, 문화적 변화에 가장 민감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교황 바오로 4세가 1559년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성기를 가리라고 지시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월 동안 미켈란젤로는 비슷한 대작을 잇달아 만드는데, 이 작품들은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며, 역사의 순간을 매우 격렬하게 표현한다. 이 작품들은 "노예"나 "포로"라고 일컫기도 한다. 첫 두 작품인 '죽어가는 노예'와 '반항하는 노예'는 1513년에 만든 것이다. 형태나 담긴 뜻은 '다비드 상'이나 '아담의 창조'에 가깝다. 하지만 1519년과 1533년 사이에 만든 '아틀라스', '젊은 노예', '턱수염난 노예', '깨어나는 노예'는 나이나 크기, 신체 구조로 볼 때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예수와 비슷하다. 이 작품들은 Julius 2세의 무덤을 위해 만든 것인데, 그 무덤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은 '모세'라는 놀라운 작품이다. 거기 있는 조각은 모두 "미완성"이다. 이에 대해 예술사가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는데, 아마 이 논쟁은 끝나지 않을것 같다. 왜 미켈란젤로는 다 만들지 않았는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둬야 했던 것일까? 아니면 일부러 혹은 일부러 그러진 않았는데 완성하지 않는게 더 좋다고 판단한 것일까? 진짜로 미완성인가? 완성하려 했다면 왜 하나를 끝내지도 않았는데 다음 것을 작업했을까? 나는 미켈란젤로가 작품에 힘을 불어넣으려고 일부러 완성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쨌든, 일부러 그랬든 그렇지 않았든, 결과는 같다. 거대한 네 인물이 돌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지만 여전히 돌에 갇혀있다. 이건 단지 작품을 만든 때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해방을 위해 몸부림친 전채 인류 역사를 힘주어 말하는 작품이다. 거의 5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노예며, 자유를 위해 싸우지만, 여전히 계급 사회와 소외, "시대의 오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처음에 나온 질문으로 돌아가자. 인류 역사의 거인이자 문화를 지탱해온 미켈란젤로의 지위에 대해 물었다. 답을 얻었다. 그러나 완전한 답은 아니다. 미켈란젤로의 여러 다른 측면은 무시됐다. 건축이나 다른 나머지 많은 작품들은 여기서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핵심은 제대로 짚었다. 미켈란젤로는 모든 작품에서 르네상스의 꿈과 희망을 다른 작가들 보다 강렬하게 드러냈다. 배신이 낳은 절망과 비참, 무너진 꿈 또한 마찬가지로 드러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사회 관계와 그 당시 사회 세력에 가장 깊숙히 연루되고 가장 활력있게 반응하는 예술이 가장 "보편적인" 호소력과 타당성을 지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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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rger, John, 1965, The Success and Failure of Picasso (Penguin).
- Berger, John, 1972, “The Moment of Cubism’, in John Berger, Selected Essays and Articles (Penguin).
- Engels, Fredrick, 1883, The Dialectics of Nature, 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83/don/ch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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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user, Arnold, 1965, Mannerism: The Crisis of the Renaissance and the Origin Of Modern Art (Routledge & Kegan Paul).
- Hauser, Arnold, 1999, The Social History of Art (Routledge & Kegan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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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hott, Rolf, 1975, Michelangelo (Thames & Hudson).
- Symonds, J A, 1911, The Life of Michelangelo Buonarroti (Macmillan).
- Vasari, Giorgio, 1991 [1550], The Lives of the Artists (Oxford University Press).
-
이 글에서 언급한 모든 작품들은 www.abcgallery.com/M/michelangelo/michelangelo.html에서 볼 수 있다. ↩
-
뉴먼이 여기에 대해 실제로 쓴 글은 Newman, 1992를 보라 ↩
-
Vasari, 1991, p414. ↩
-
Symonds, 1911, volume 2, p174 ↩
-
Gombrich, 1978, pp217-218. ↩
-
Vasari, 1991, pp277-278, 280. ↩
-
Schott, 1975, p7. ↩
-
Charles de Tolnay, cited in Sala, 1995, p170. ↩
-
Engels, 1883. ↩
-
Antal, 1948, pp11-13. ↩
-
Hauser, 1999, volume 2, pp9-10. ↩
-
Hauser, 1999, volume 2, p7. ↩
-
Gramsci, 1971, p351. ↩
-
Hauser, 1999, volume 2, p105. ↩
-
Hauser, 1965, especially pp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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