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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 투쟁

사람들은 마르크스에 대해 잘 모른다. 요즘은 1980년대 같지 않다. 나도 마르크스를 알기 전에는 ‘폭력 혁명의 주창자’가 유일한 이미지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방법론은 꽤나 면밀하다. 마르크스의 방법론은 전혀 추상적이지 않고, 따라서 호오가 분명하다. 마르크스주의의 분명한 장점이다.

그리고 그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사회 변동의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명확히 한 점이다. 인류 역사에는 수많은 반란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반란 중 성공에 이른 반란은 많지 않다. 서양에서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에서 시작해, 한국 역사의 망이 망소이까지. 피지배계급이 일으킨 반란은 참혹한 학살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은 약간 다르지만 결과는 같았다. 농민 반란은 자신들의 왕을 배출했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과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농민 출신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를 근저에서 변혁하지 못했다.

역사상 피지배계급이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며 변화시킨 예는 지금까지 부르주아들이 유일하다(물론 러시아 혁명은 잠시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며 변화시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0년도 안 돼 압살당했다). 이들은 신분제 사회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 힘은 상업과 산업에서 나왔다. 이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민중?

민중이라는 말은 권력자들, 지배자들이라는 말과 대비시켜서 사용하는 말이다. 좀더 사회과학적으로 말하자면 피억압계급 전부를 지칭한다. 하지만 피억압계급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기 때문에 모호한 말이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 당시, 부르주아와 상큘로트[각주:1], 그리고 농민 모두 민중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부르주아를 빼야 할 것이다.

부르주아 혁명의 주도성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민중인가 부르주아인가? 학자들은 대답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부르주아에게서 나왔다.[각주:2] 물론 프랑스 혁명에서 소심한 부르주아들을 끊임없이 밀어 붙인 것은 상큘로트였다. 그러나 그 결과로 만들어진 사회는 부르주아를 위한 사회였다. 상큘로트, 도시 노동계급은 아직 자신들을 본뜬 사회를 만들기엔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

노동계급


마르크스는 부르주아가 뿌리째 사회를 변화시켰던 것을 봤다. 그리고 그 결과 새로 탄생한 대규모의 계급을 봤다. 마르크스가 봤던 것은 노동자 계급이었다.

영국 청교도[각주:3] 혁명, 미국 혁명, 그리고 프랑스 혁명. 이 세 혁명을 보면서 수많은 부르주아들은 인류의 밝은 미래를 상상했다. 그런데 현실은 그들의 기대를 완전히 배신했다. 부르주아들은 노동계급을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노예보다 가혹하게 부려먹을 때도 있었다. 노예는 어쨌든 주인이 먹여 살려야 했지만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먹여 살릴 책임이 없었다. 필요없어지면 해고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동정적 부르주아들이자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오웬 같은 이들이다.

마르크스는 말했다. 역사는 그렇게 개선되는 게 아니라고. 피억압계급의 투쟁이 역사를 변화시킨다고 말이다. 그리고 과거에는 피억압계급의 힘이 모자라서 사회를 뿌리에서 흔들어도 결국 그 과실은 지배체제의 변화를 낳을 뿐이었지만, 이제 역사상 가장 강력한 피억압계급이 나타났다고 말이다. 바로 노동계급이다.

노동자들이 과거의 피억압계급에 비해 유리한 점은 분명하다. 이들은 협동해서 일해야 한다. 한 작업장 수준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말이다. 철강 노동자들의 철이 없으면 자동차 노동자들은 자동차를 만들지 못한다. 발전 노동자들이 일하지 않아도 자동차 노동자들은 자동차를 만들지 못한다. 철강 노동자들이 일해도 화물 노동자들이 일하지 않으면 자동차는 만들어질 수 없다. 그물망처럼 촘촘히 짜여진 생산 체계, 이것이 마르크스가 노동자들에게서 봤던 점이다.

△직물 노동자들의 파업. (1915년 시카고

그리고 거의 비슷한 노동의 조건이 추가된다. 한 노동자의 임금만 올리기 힘들다. 현대차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이 현대차 계열사들, 그리고 협력업체들의 임금인상을 이끄는 것처럼 한 사회 노동자들의 작업 조건은 대체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불황기에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해고하지만 호황기에는 노동자들이 임금협상에서 우위를 점한다. 노동자들은 협력의 그물망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단결하기도 편했고, 행동을 통일하기도 편했다. 그래서 동일한 노동조건을 쟁취하기도 편했다. 이것도 마르크스가 중요하게 여겼던 점이다.

소상인과 농민

노동자들은 농민이나 소상인과 달랐다. 소상인은 협력 플레이를 하지 않는다. 건너편 슈퍼와 친하게 지내는 이쪽 슈퍼 아저씨도, 건너편 슈퍼가 망했을 때 객관적으로 이득이다. 농민은 옆집 농민의 땅을 구입해서 땅을 늘리면 객관적으로 이득이다. 노동자는 옆자리 노동자가 사라지면 불편하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자 투쟁

봉건제를 무너뜨리는 데서는 부르주아들이 핵심 역할을 맡았다. 부르주아들이 그런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데 있어 노동자들이 바로 핵심적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들처럼, 바로 노동자들이 그런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중요하게 여긴다.[각주:4]

그래서 나는 보건의료노조의 투쟁이 잘 됐으면 좋겠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승리했으면 좋겠다. 현대차 노동자들이 악선동에 주눅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차별을 감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저임금 투쟁이 사회적 투쟁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노동계급이 자신들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면 한다.

  1. 도시 노동자들 [본문으로]
  2. 물론 민중의 나머지 부분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힘이 발휘되기 위한 인과관계에서 핵심은 부르주아다. [본문으로]
  3. ‘허세만’님의 다음 댓글을 참고하면 ‘청교도’라는 단어를 왜 지웠는지 알 수 있다.

    '청교도 혁명'이라는 용어는 '영국 혁명'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영국 혁명은 오래도록 주류 부르주아 사학자들에 의해서 '청교도 혁명'이라는 말로 본질이 왜곡되어 왔습니다. 그 말인즉슨 청교도들이 가톨릭 교도들과 싸워서 종교의 자유를 쟁취한 정치 혁명 혹은 종교 혁명 정도의 상부 구조 혁명이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영국 공산주의자 역사가 모임'(이안 버철 등이 참가하고 있던 모임)의 한 일원이었던 크리스토퍼 힐은 영국 혁명에 대한 자신의 몇몇 기념비적 저작에서 이러한 주류적 시각을 여러 차례 비판했습니다.
    폭압적이었던 찰스 1세를 영국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과정까지 주도 세력은 청교도들과 부르주아라고 부르기 모호한 중소상인 혹은 중소 지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찰스 1세의 처형 문제를 가지고 크롬웰과 일부 장로교도들이 분열한 후, 크롬웰이 이끄는 중소상인-중소지주들로 이루어진 철기군이 민주적 중앙집중제에 가까운 원리를 통해 왕당파들을 크게 무찌르고 찰스 1세의 처형을 이뤄내고야 맙니다. 이후 크롬웰의 철기군 내에서 '수평파'라고 불리는 이들이 장교 선출제와 민주주의적 개념을 선동-선전하는 유인물을 발간하게 됩니다. 이들의 기여가 아니었다면 영국에서 민중들이 자신의 권리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고, 왕권신수설이 명예혁명 이후 더 확실히 부정되어 부르주아 세력이 크게 성장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을 겁니다.
    한 줄 요약하자면, '청교도 혁명'이라는 말은 주류적 의미이며, 정치 혁명이나 종교 혁명의 의미로 쓰입니다. 반면, '영국 혁명'이라는 용어는 사회 혁명의 의미로 쓰입니다. 굳이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이 '영국 혁명'이라는 말을 쓰는데는 이유가 있겠지요.
    스탈린주의의 잘못된 모습을 배격하고 진리를 추구하려고 했던 진정한 맑시스트 역사가 크리스토퍼 힐(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미국의 세계 제패 전략'의 서문에서 그에 대한 추모사를 썼습니다. 그 책이 나올 때쯤 그는 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죠.)의 주장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이 글이 쓰였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청교도 혁명'이라는 용어를 고집하는 몇몇 극우-왕당파 역사학자들의 뻔뻔스럽고 변화를 원치 않는 모습이 생각 나서 이 글을 써봤습니다. ^^; [본문으로]
  4. 사실 마르크스주의자들 만큼이나 노동자들의 투쟁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지배계급이다. 이들은 실제 자신들을 흔드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기 때문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