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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와 변증법

내가 감히 변증법의 모든 측면을 잘 다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해한 바를 써 보려고 한다.

변증법에 대한 두산백과사전의 정의를 보자.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

뭐 그럭저럭 핵심은 짚었다고 생각한다.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 라고 한다.

짧은 설명에 저정도면 뭐 괜찮지.

나는 현대의 학문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하거나 희석화했다고 생각하지만, 학문은 학문인 법. 나름대로 학자들의 정리는 참고할 만한 점이 있다.

지금부터는 변증법을 현실에서 출발해 이해해 보자!

자본주의는 다른 체제로 대체될 것인가

변증법은 변화를 설명하는 학문이다.(위의 정의에는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라고 돼 있다.) 사물도 세상도 변한다는 거다.

흔한 예를 들어 보면,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다르다는 거다. 몸무게부터 시작해서 키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사람도 매일매일 변한다. 자연과학적으로도 말이다.

자, '변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그걸 설명하는 게 나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그럴까.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사회 운동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혹은, 세상이 변할 필요가 없다면 사회운동이 더이상 필요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으로 자본주의는 변증법을 별볼일없게 만들고 희화화하는 것 같다. 왜? 자본주의는 더이상 변화가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어하니까.

물론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하는 체제고, 어느 때보다도 변화가 극심한 체제다. 포드주의 포스트 포트주의, 정보 사회 등등 자본주의의 주요한 혁신만 해도 여러 개가 된다.

하지만 핵심적으로 자본주의는 현대 세계의 승리한 체제고, 자신의 핵심인 시장과 임금노동, 자본간의 경쟁 등에서는 변화가 없을 거라고 주장한다. 내부적인 혁신만으로 변화를 제한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 소련과 동구권 국가자본주의 체제[각주:1]들이 몰락하고 나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선언했다.

"이제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가능한 체제고, 더이상 체제가 변할 일이 없다. 역사가 종말했다!"

변증법의 현대적 창시자인 헤겔은 인간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역사를 변화시켜 왔다고 설명한다고 한다. 근대 민주정에서 인간은 신분제를 철폐했다. 이에 따라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신분들이 해방됐다. 즉,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충족됐다는 거다. 다시 말하면,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생겼던 모순이 해소됐다. 그래서 헤겔은 자본주의 국가가 역사의 완성이라고 봤다. 말년의 헤겔은 보수적이었다. 후쿠야마는 헤겔의 논리를 답습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은, 여전히 세상이 변할 거라고 말한다.

어떻게 변하는가? - 자기모순 때문에 변한다.

변증법은 변화를 설명하는 논리라고 위에서 말했다. 하지만 변화의 양상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외부 충격으로 인한 변화가 있다. 

천안함이 내부 모순으로 무너졌을지 외부 충격으로 폭파됐을지는 모르지만 여튼간에 어뢰를 맞은 배는 철조각으로 ‘변한다’.

둘째, 내부 모순에 의한 변화가 있다.

(여기부터 존댓말;; 갑자기 왜 존댓말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쓰고 나니 그렇게 써 놨다;;)

천안함이 균열로 인해 무너졌다고 보는 입장이라면 아래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겠죠.

(이 사진의 출처는 씨네마포디 한국 유저 그룹입니다.)

외부 충격없이 내부의 균열이 가속화되면서 무너진 것으로 보는 것이죠.

그럼 이게 왜 모순입니까?

쟤는 배입니다. 그쵸? 근데 두 동강 나면 배가 아니죠. 원래는 하나로 이어진 배인데, 배에 있는 균열은 배가 두조각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균열을 걍 놔두면 배가 두동강나겠죠. 그럼 더이상 배가 아니라 철조각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균열은 ‘배를 더이상 배가 아니게 하는 것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정리해 볼까요?

  • 배 - 하나다. 배다. 배를 긍정한다.
  • 균열 - 두동강. 배가 아니다. 배의 부정을 지향.

저 모두가 배에 포함돼 있습니다. 즉, 배의 긍정과 배의 부정이 모두 하나의 배에 있는 것이죠. 내부 모순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장난처럼 들리나요? 추상화가 높아지면 장난처럼 들리는 법입니다.

자, 천안함은 내부 모순으로 파괴되었을까요 외부 충격으로 파괴되었을까요. 그건 여기서 다룰 주제는 아니죠 ㅋ

농담 그만하고.

내부 모순으로 변하는가 외부 충격으로 변하는가는 중요한 시사점을 하나 더 갖습니다. 바로 인간 세계를 신이 운영하느냐 인간이 운영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인간 세계를 신이 다스린다면 그건 외부의 개입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내부 모순으로 변한다면 그건 신이 개입한다는 걸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적어도 신이 일단 창조한 다음에는 개입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죠.)

즉, 내부 모순으로 세계의 발전을 설명하는 변증법은 신으로부터 인간이 독립한다는 함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변증법은 인간사회가 내부 모순으로 인해서 변해 왔다고 설명합니다.

헤겔은 인정욕으로 그걸 설명한 거죠. 마르크스는 경제의 모순으로 설명합니다.

마르크스의 설명으로 바로 들어가 보죠.

자본주의부터 볼까요? 노동자는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자유롭지 않습니다. 뭘까요? 모순이죠.

자유롭다는 것은 정치적인 의미에서입니다. 정치적으로 자유롭죠.(한국에서는 국가보안법의 존재 때문에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어쨌건 형식적으로 봅시다. 그리고 독재 때보다는 자유롭죠.)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전혀 자유롭지 않습니다. 사장의 말에 복종해야 하죠. 아래는 사장의 성희롱 사례가 노조덕에 폭로된 예외적 사례입니다.

노조는 피해 여학생과 현장에 있던 여직원 등을 통해 사실을 확인한 뒤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최 대표의 성희롱 발언에 대한 진상규명과 처벌을 요청했다. 노조 게시판이 시끄러워지자 모기업인 ㅅ그룹은 지난 3월 윤리사무국 직원을 보내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감사 결과 ‘혐의 없음’ 결론이 나오자 여직원들은 추가 성희롱 피해 사례를 모으기 시작했다. 

노조에 접수된 성희롱 사례에 따르면 최 대표는 지난해 호텔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던 중 여직원에게 “이런 운동을 하면 젖통이 커지냐”고 말했다. 같은 해 열린 주방 직원들과의 족구대회에서는 한 여직원이 옆자리에 앉자 최 대표가 “어! 이×, 사복 입으니까 섹시하게 생겼네”라고 말했다. 한 여직원은 “최 대표가 다가와 목 주위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아 수치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회식 자리에서 최 대표가 성적 모욕감을 유발하는 건배사를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현장에서]“성희롱 사장을 고발합니다””, <경향신문>, 2010-07-23 02:41:49

노조가 ‘추가 성희롱 피해 사례를 모으기 시작했다’는 부분이 있죠? 노조가 조사를 하기 전에는 사람들이 그냥 참았다는 말입니다. 왜요?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니까 사장한테 함부로 대들 수가 없었던 거죠.

△사장에게 성희롱 당하는 여성들이 바보라서 아무 말도 못할까요?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 사이의 모순입니다. 이게 자본주의예요.

자본주의의 모순을 또 하나 볼까요?

전기는 공공재죠? 그런데 김대중 정부는 발전을 민영화하려고 했습니다.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저지됐죠.

그럼 공공재가 공공성있게 사용되고 있으니 일단 모순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네요.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자, 그럼 왜 제가 전기를 예로 들었을까요.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전기만 공공재입니까? 네. 당연히 아니라고 할 수 있겠죠. <레프트21>은 “이제 전력ㆍ통신ㆍ가스ㆍ철도 등은 국민 모두가 일상 생활에서 끊이지 않고 공급받아야 하는 혈액과 같은 공공 사회재가 되었다” 하고 말합니다.(공기업의 사기업화 - 민영화에서 공공성으로)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기업은 사람들을 고용합니다. 왜? 이윤을 내려고요. 자본가의 사적 재산을 불리기 위해서죠.

그런데 영화 <전우치>에서 전우치는 500년만에 풀려나 신선들에게 묻습니다. 

"왕이 없다면 백성들은 누가 먹여 살리는가?"

신선들은 대답합니다.

"상인들이 먹여 살립니다."

△“장사치들이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속임수도 가리지 않는데, 그런 장사치들이 백성을 먹여살린다고?” 하는 전우치의 말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말입니다.

오호 통재라! 우리 전우치는 한탄합니다.

그런데 잠깐,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통찰을 발견합니다.

상인들은, 그러니까 사장들은 자기 이윤을 위해 기업을 운영하는데, 그게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립니다. 즉, 기업은 공공재인가요 사유재산인가요? 

와우~! 이럴 때 우리는 모순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유재산과 공공성 사이의 충돌이지요.

물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은 사적 소유를 향한 이기심이 자연히 공공성을 충족시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고 외칩니다. 

△이건희의 이기심이 우리를 먹여살리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정말 그런가요? 삼성 이건희가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이 백혈병에 걸려 죽어 나자빠져도 결코 산업재해라고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는 걸 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네. 사적 재산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지는 공공적 역할을 하는 체제. 이것이 자본주의의 중요한 모순입니다. 이 때문에 수많은 갈등이 생겨나는 것이죠. 이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인류는 불행할 겁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말합니다. “자본주의가 완벽하다고? 헛소리. 자본주의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뭐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본주의에는 내부 모순이 있어. 그 모순 때문에 언젠가는 무너질 거라고.”

자자. 자본주의가 공공성을 어느정도 책임질 때는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2차대전 직후부터 70년대까지 이어졌던 대호황의 시기에 서구에서는 어느정도 완전고용을 달성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같은 경제 위기 시기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죠.

자, 여기서 자본주의의 사적 소유와, 백성을 먹여 살리는 역할 - 즉, 공공적 역할을 하는 기업체 사이의 모순이 충돌하는 경우를 발견하게 됩니다.

언제인가요? 맞습니다. 2009년, 경제 위기가 세상을 강타하면서 바로 그렇게 됐습니다.

  • 기업은 사적 소유다! 그러니 사장 맘대로! 짜르고 임금 깎아!
  • 우리 일자리를 니맘대로 하면 되겠냐?! 해고는 살인이다!

△니가 뭔데 우릴 맘대로 짜르냐구!

이런 그림 자주 보시죠? 네. 쌍용차 때 그랬습니다. 완전 모순이죠. 이런 모순은 경제 위기 때만 되면 첨예해 집니다.

그럼 경제 위기가 없으면 되겠군요~! 올레~!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쓰느라 그렇게 고생한 겁니다.

《자본론》은 자본주의에서 왜 경제 위기가 필연인지를 밝힌 책입니다. 그래서 이런 모순의 충돌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거죠. (마르크스주의와 공황론에 대해서는 여기서 자세히 쓰지 않을 테니 <레프트21>의 “왜 세계는 지금 경제 위기에 직면했는가?”를 보세요.)

자자,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요? 사람들은 묻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다음 섹션은 바로 이에 대한 변증법의 대답입니다.

양질 전화 -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 하지만 변화는 조금씩 쌓이다가 갑자기 일어난다고

그렇습니다. 변증법의 중요한 측면은 바로 양질 전화입니다. 양이 쌓이다보면 질이 변한다는 거죠.

사람의 성장을 보죠. 애기 때의 사촌동생이 어느날 어엿한 대학생이 되서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느끼던 심정 어떠세요? 갑자기 그렇게 된 것 같죠? 하지만 사촌동생을 키우던 작은엄마는 하루하루 아기의 변화를 다 지켜봤을 겁니다. 애기는 애기였는데 변화가 별로 없었는데 변화가 하루하루 쌓여 10년, 20년이 지나니까 애가 어른이 돼 버린 겁니다.

변증법의 논리를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루하루 변화가 쌓여서 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뭐 가장 많이 드는 예로 물이 99도까진 그냥 물이다가 100도가 되면 수증기가 되는 예도 있습니다. 양은 점차 쌓이다가 갑자기 질적 변화로 도약하는 거죠.

이명박에 맞선 2008년 촛불 시위도 볼까요? 아래는 촛불의 배경에 관한 내용입니다.

<경향신문>이 메릴랜드대학교ㆍ동아시아연구원과 공동으로 국제 여론 조사를 해 발표한 결과를 보면, 한국인의 78퍼센트가 “정부는 소수의 거대 이익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한다”고 답했다(5월 15일치). 이명박 정부의 ‘강부자’ 내각 등장으로 “대기업 외국인 강남부자를 위한 정부”라는 생각은 더욱 굳어졌을 것이다. 오늘날 정치인들과 평범한 사람들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고 있다.(“버스값이 70원 하냐”는 정몽준에 대해 시위대는 “정몽준은 버스 타라”고 외쳤다.)

따지고 보면, 이런 문제는 소위 ‘민주화’ 과정이라고 부르는 지난 10~20년 동안에 꾸준히 발전해 왔던 일이다. 양극화 문제에서 보듯이 사회적 불평등이 더 심화됐고, 선출되지 않은 기업 집단의 결정권이 더 커졌고, 대중이 동의하지 않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요하기 위해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가 후퇴하는 일도 있었다. 노무현 정부가 한미FTA 반대 집회를 원천 봉쇄했듯이 말이다. 사실, 이것은 한국만의 예외적 현상이 아니다. <워싱턴포스트>가 인터뷰한 미국 시위대의 외침에서 보듯이, 지난 10~20년 동안 전 세계에서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정부는 판매용이고 대기업이 정부를 구입한다.”

김하영, “촛불은 어디로? ─ 중간 평가와 전망”, <저항의 촛불> 2호, 2008-08-14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아시겠어요? “따지고 보면, 이런 문제는 소위 ‘민주화’ 과정이라고 부르는 지난 10~20년 동안에 꾸준히 발전해 왔던 일이다.” 이 부분입니다. 즉, 촛불이라는 질적 도약이 있기까지 수많은 변화가 천천히 쌓여 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시위가 느닷없이 등장했다고 설명하는 거 자체가 이상하죠. 대중이 보수화했네 하면서 예상 못한 사회운동가들은 반성해야 합니다. 대중 투쟁의 가능성을 주장했던 거의 유일한 진보진영 세력은 ‘다함께’였습니다. http://www.left21.com/article/4883

촛불의 시발점이 된 광우병 쇠고기 문제 역시 한미FTA 반대 투쟁을 할 때 민주노동당 등에서 꾸준히 제기해 온 문제입니다. 그런 꾸준한 제기가 쌓여서 촛불에 불을 댕긴 것이지요.

변화가 없어 보인다고요? 꾸준한 변화를 관찰하세요. 촛불이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지만, 꾸준한 관찰을 한 사람들에게는 물이 10도에서 100도까지 올라가는 과정이 눈에 보인답니다. 변증법은 바로 그런 운동의 원리를 말해 주는 논리입니다.

맺으며

이 글에서 저는 변증법의 모든 측면을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변증법의 요소 세 가지를 다뤘습니다.

첫째, 변화. 둘째, 모순. 셋째, 양이 쌓여 질이 변한다.

이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사회를 관찰한다면 우리는 비관론에 빠지지 않고 이명박 정부에 맞서 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1. 나는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순수한 형태의 국가자본주의였다고 생각한다.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다면 http://www.left21.com/article/7199 를 참고하세요.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