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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1945년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의 계보

이 글은 《해방정국과 조선혁명론》(해방3년사연구회 지음, 대야출판사, 1988)의 2장, 조선공산당의 변혁운동론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요즘 세미나를 하는데, 발제용으로 요약한 것이고, 나는 이 책의 관점에 전부 동의하지는않는다는 점을 밝힌다.

그냥 서술한 부분은 책을 요약한 것이다. 내 생각을 덧붙인 곳에는 반드시 "내 생각 : " 혹은 "내 생각엔," 이라는 말을 써서 책의 내용과 내 생각이 혼동되지 않도록 했다.

아래 요약 구조는 기본적 소제목 등은 책을 따랐으니 내가 임의로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한대로 재구성한 측면도 있다.

1.연혁

해방 직후 공산주의자들은 가장 먼저 정치세력을 형성했는데, 일제 하에서 투쟁을 계속하면서 중요한 반일 저항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뒷부분에도 나오는데, 공산주의자들은 기층 민중에게서 신뢰를 가장 많이 받고 있었다고 한다.

박헌영

△박헌영이 최후에 속했던 경성 콤그룹은 일제의 탄압 하에서도 끝까지 지조를 지켜 해방 직후 운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한다.


공산주의자들이 강력한 규율과 조직성을 지니고 있었던 점도 주요한 원인이 됐다.

그런데 조선공산당의 최대 약점은 파벌성, 분파투쟁이었다. 이를 극복하지 못했던 게 해방 직후의 운동에도 영향을 끼친다.

조선공산당의 파벌은 4개다. 아래와 같다.

  • 서울계 : 1921.1.27 결성한 서울청년회에서 비롯. 나중에 당으로 전환. 1924년 조선공산당 조직. 코민테른이 화요회계를 정통(?)으로 승인함에 따라 타격을 받음.
  • 화요회계 : 1923.7.7 결성한 신사상 연구회에서 비롯. 원래는 연구기관이었던 것인데, 행동단체로 전환하면서 이름을 화요회로 변경. 선언과 강령은 발표하지 않음. 탄압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함. 행동으로 입증하면 된다는 입장이었다고. 1925년 북풍회와 연합해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
    (내 생각 : 우리가 알 만한 인물들은 여기 다 모여 있다. 홍명희, 조봉암, 박헌영, 김단야.)
  • ML계 : 1926.9.3 재건된 3차 조선공산당. 분파투쟁 청산이 슬로건. 신간회(통일전선)와 근우회 지도.
  • 경성 콤그룹 : 1939~1941년. 박헌영이 지도자에 포함. 최후까지 전향하지 않은 점이 유명. 40년대 군국주의적 탄압을 이기고 신진 공산주의자들을 조직한 점이 유별한 점이라고 서술.

해방 직후 8.15에 전향하거나, 운동 때려 쳤던 사람들이 조선공산당을 조직(장안파) → 당연히 반발. 정통성도 없었음.

8.20에 박헌영이 지도하는 조공재건준비위원회가 결성. 정당성없는 장안파 흡수. 그러나 분파투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박헌영 등에게 정통성은 있었으나 이들은 너무 배타적이었다는 한계가 있었음. 이게 계속 발목을 잡음.(내가 아는 바로는, 조선공산당은 당대회도 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