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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1945년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의 국제정세 인식, 경제 토대 분석

이 글은 앞의 글(1945년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의 변혁운동론 - 1. 연혁)에서 밝힌 대로, 《해방정국과 조선혁명론》(해방3년사연구회, 대야출판사, 1988)의 2장(조선공산당의 변혁운동론)을 요약한 것이다. 내 생각은 이 책의 생각과 다르다는 점을 밝힌다.

2.변혁운동론

가.국제정세에 대한 인식

조공은 2차대전을 파시즘 대 민주주의 간의 전쟁으로 규정.[각주:1]

조공은 미국을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있었음.

그런데 조공은 미군정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애씀.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고 체계 :

  1. 미소의 힘으로 해방됐기 때문에, 이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
  2.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지만, 소련은 노동자 국가다.
  3. 2차대전 때 이루어진 미소 동맹은 견고하고 오래 갈 것이다.
  4. 소련이 진보적인 역할을 할 것이므로, 미소와의 관계를 잘 다져서 독립할 수 있다.

△<조선인민보> 1946.5.12. 1945년 9월 8일 서울에서 가장 먼저 나온 일간 신문으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였다. 1946년 9월 6일 미군정청은 미군 축출을 선동했다는 구실로 신문을 정간(停刊)시켰다. (출처 : http://www.kmoh.org/kmoh_exh_2f_02.html )


당시 <조선인민보>는 이렇게 썼다.

우리의 완전한 독립도 소ㆍ미의 협조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 소ㆍ미의 협조없이는 조선의 정부수립도 …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ㆍ미협조에 노력해야 합니다.

<조선인민보> 1946.6.1 - 《해방정국과 조선혁명론》 (1988), 33p에서 재인용.

이번 내전기간 동안에 결성된 통일전선을 바탕한 연합국의 협조는 의외로 강고한 것

<조선인민보> 1946.4.30 - 《해방정국과 조선혁명론》 (1988), 34p에서 재인용.

위에서 내전기간은 '대전기간'의 오타인 듯하다. 즉, 2차 세계대전을 말하는 듯하다. 연합국의 협조는 미ㆍ영ㆍ소를 의미한다.

아래 인용도 보자.

 소련이 국제 신탁(후견)제에 참가함으로써 문제의 신탁제의 진보적 성질을 살리고 보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나니 … 신탁제의 진보성과 보수성 … 을 인식하되 그 진보성의 우세를 믿으며 이에 대한 신념을 갖기 때문에 …

<조선인민보> 1946.2.25 - 《해방정국과 조선혁명론》 (1988), 34~35pp에서 재인용.

당시 조공의 이런 인식은 "국제협조노선에 대한 과대평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간의 모순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라고 책은 평가한다.

(여기서 내 생각 : "국제협조노선에 대한 과대평가"는 조선공산당의 탓이라기보다는 냉전 돌입 전까지 미국과 협조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했던 소련과 스탈린의 정책 때문이었다고 보는 게 옳을 듯하다.)

1946.7 조공의 신전술 - 미군정에 압력을 넣어 우호적으로 만들기

신전술 이후 조공은 미군정을 적극 폭로. 그러나 신전술의 목적은 "미소공위를 재개시키고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통일임시정부를 달성하려는 전술이었다"(책 36p)

나. 토대분석

이 책은 당시 조공이 "조선사회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결여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예로 든 것은, 농민의 계급분화 현상을 제시하고 있지 못한 점이다.

1946년 이후 경제 논문에 조공의 경제 토대 분석이 등장한다.

조공의 경제 토대 분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일제는 조선에 근대적 토지사유를 강제적으로 확립했다.
  2. 동시에 반봉건적 영세농과 반봉건적 소작관계를 재생산했다.
  3. 그 결과 조선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가로막혔다.

이 책은 이런 인식에 대해 "농민의 토지소유로부터의 분리라는 매우 중요한 현상을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조선공산당 이기수는 일제 정책의 결과

  1. 조선은 후진적 농업국
  2. 사회적 생산력이 저윽이 뒤떨어진 현실

이 생겼다고 말하는데, 내 생각에 저게 왜 1,2로 나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후 조공의 권태섭은 《조선경제의 기본구조》라는 책에서 "반농노제적 식민지적 형태가 확립"됐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내 생각에 이 부분에서는 모순이 발견된다.

권태섭은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하여 상품경제가 농촌에 침투하고 미곡이 상품화되면서 지주에의 토지집중이 나타"났다고 쓰는데, 상품화가 농노제와 도대체 양립 가능한가?[각주:2] 권태섭은 "반봉건적 착취관계"가 강화된다고 했다고 이 책은 서술하고 있다. 착취는 자본주의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각주:3]

반봉건적 착취라는 게 의미하는 바는 아주아주 모호하다. 인구의 다수가 농업에 종사한다고 해도, 생산의 핵심이 상품경제이면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연결돼 있다면 그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로 보는 게 옳다.[각주:4]

이 책도 나름대로 모순을 지적하는데, 일단 이 책은 권태섭이 "식민사관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정체성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말은 이해가 간다.[각주:5] 그런데 이 책은 "정체성론" 때문에 "한국사회가 그 주요 모순으로 제국주의와 식민지 전체 민중과의 모순을 안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하게 된다"고 있다. 이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식민지 전체 민중의 제국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데 무슨 정체해 있다는 말이냐?!" 라고 이해하면 되는 것인가?

이 책은 권태섭의 입장이 또한 "혁명의 전 과정에서 관철되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 전체적으로 부족하다"고 쓰고 있다. 나는 이 말을 농업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이 책은 권태섭의 이런 입장은 "인정식을 중심으로 한 '봉건론'파의 토대분석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며, 그것이 권태섭의 연구로 구체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쓰고 있다.(40p)

  1. 당시 한반도의 모든 좌익 세력이 이렇게 이해했다. [본문으로]
  2. 미국 노예제를 보면 가능하기 때문에;; [본문으로]
  3. 반봉건적 착취라고 했으므로 이것도 패스. [본문으로]
  4. 당시 '자본파'는 일부 봉건 요소가 잔존해 있으나 자본 관계가 촉진되는 과저이었으므로 자본주의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내 입장이 자본파와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자본파의 입장이 더 합리적인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5.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봉건파가 정체성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을 한국사 전공자에게 들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