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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도요타 리콜 사태, 비정규직 때문이다?

오늘 한겨레 신문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발견했다. 아래 기사다.

“도요타 사태 화근은 일등 강박증·비정규직 양산·봐주기 언론…”

내가 눈여겨 본 부분은 아래 부분이다.

-비정규직의 마구잡이 고용 문제가 도요타 사태의 또다른 배경이라는 지적이 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평균 급료가 절반에 불과하다. 40대 도요타 정사원은 대체로 연봉 1000만엔 정도이지만 비정규 기간공은 언제 잘릴지도 모른 채 불안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실제 도요타는 2008년까지 매년 2조엔 정도의 막대한 영업이익을 남겨 호황기에 12조엔이 넘는 막대한 사내유보금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2008년 말 리먼브러더스 충격 여파 때 비정규직 사원들을 대량해고했다. 2~3년 전엔 어느 기간공이 혹사당한 나머지 프리우스 제조현장에서 브레이크의 주요 부품을 일부러 좌우 거꾸로 조립한 사실이 출하 전에 발견돼 부랴부랴 대처했다는 사실을 새로 취재해 <주간금요일> 최근호(19일 발행)에 실었다.

과거에는 숙련공 정규직이 후배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시스템이 잘 진행됐다. 종신고용제가 일본 기업의 강점이었다. 모노즈쿠리(물건 만들기)라는 일본 기업의 좋은 기업문화가 지나친 경비절감 정책으로 없어지고 말았다. 또다른 문제점은 2007년부터 도입된 도요타의 성과주의에도 있다. 생산성이 높은 라인에 봉급을 올려주는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 숙련공이 비정규직 신참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성과를 내기 위해 자기중심적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다.”

위 기사에서 인용한 것이며, 강조는 내가 한 것이다.

한마디로 노동자들 사이에 엄청난 경쟁을 도입한 결과, 즉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결과 품질이 개판났다는 얘기다.

노동자 경쟁 강화는 기업에 단기적 이득

노동자들 사이에 경쟁이 강화되는 것은 사장 입장에서는 이득이 된다. 노동자들이 협동하지 못하면, 저항력이 줄어들고, 임금과 노동환경 협상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이기 쉽다. 당장 위 기사에서도 지적된 바가 있다.

도요타의 제2 노조인 ‘전도요타노조’의 와카쓰키 다다오 위원장 … 그는 도요타가 2000년부터 3년마다 총경비의 30% 절감계획을 너무 무리하게 추진한 결과 가격을 우선해 품질을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비정규직이 너무 많아서(2005년 생산현장 인원의 39.4%) 여유를 가지고 개발하거나 충분히 품질을 체크하는 태세가 되지 못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회사 쪽은 소수 노조라는 이유로 이런 내부 건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위 말은 회사의 문제점을 개선하라는 건의를 했다는 얘긴데, 핵심 내용은 비정규직이 너무 많다는 거다. 도요타는 비정규직을 많이 사용하는 게 이윤을 많이 남기는 길이었으므로 수용하지 않은 것이다. 즉, 노동자들의 단결하지 못하면 사측에 노동자들의 권익을 강제할 힘이 없어진다는 것이고, 당연히 노동자들이 받아야 할 몫이 모두 사장과 주주의 돈으로 흘러가 버린다. 생각해 보라. 정규직 임금에 비해 절반에 불과한 비정규직 임금... 그렇다면 비정규직이 받지 못한 절반의 임금은 어디로 간 것일까? 당연히 사장들 주머니로, 회사의 사내 유보금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그 비정규직은 바로 서민들이다. 서민들을 갈취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것이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품질이 개판이 된 것이다.

기업이 정신차릴 때(?) - 노동자들의 반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노동자들의 몫을 줄여 이윤을 최대화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기업에 충성심을 갖지 못하면 혹은 일이 너무 경쟁적이어서 협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기업이 만드는 제품에 문제가 생긴다. 자본주의가 미우나 고우나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복지를 필연적으로 제공하는 근거가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너무나도 근시안적인 기업들은 이조차도 격렬한 투쟁이 있을 때만 허용했다. 자본주의의 초기 순수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산업시대 초기의 영국이다. 당시 영국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30대가 체 못 됐다고 한다. 노동계급의 인구가 줄어들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기업은 이를 개선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영국 노동자들은 러다이트 운동, 차티스트 운동 등으로 거의 봉기에 가까운 저항을 일으켰다. 자본가들 중 노동계급의 상태가 너무 최악이라서 국가가 붕괴 위기에 처할 수도 있음을 걱정하던 소수가 이 때에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노동시간이 규제되기 시작했다.

공장 라인에서 일하는 해골들

△산업화 시대, 부르주아들의 탐욕을 풍자한 삽화

만약 노동계급의 거대한 반란이 없었다면, 지배층의 ‘선각자들’은 자신들의 걱정을 ‘말하기’만 하고 결코 현실화하기 위한 강력한 압력을 넣지 않았을 것이다.(못했을 것이기도 하다. 그들이 무슨 수로 압력을 넣겠는가. 실질적 압력은 강제력을 수반한 것일 텐데, 강제력으로 이윤을 갉아먹는 조치를 하는 것은 부르주아 계급 출신인 그들에게 거의 불가능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정치가  헤일셤 경의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사회 개혁을 하사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당신들에게 사회 혁명을 선사할 것이다.”(전쟁과 근본적 사회 변혁, 월간 <다함께> 7호 | 발행 2001-12-01)

도요타 본받으라던 언론들과 그렇지 않다고 말한 언론

도요타의 지금 사태를 보면서 옛 논쟁이 떠올랐다. 주류언론들은 도요타를 본받으라고 했고, ‘운동권’ 단체들은 이를 반박했었다. 당장 사회단체인 '다함께'가 발행했던 <맞불>(지금은 <레프트21>에서 볼 수 있다)의 한 기사가 생각났다. 그 기사의 내용은 이랬다.

주류 언론들이 노동자들더러 본받으라고 강조하는 도요타의 ‘임금 동결과 무쟁의’를 통한 ‘노사상생’ 사례도 허구이긴 마찬가지다. … 도요타는 노동자들과 회사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낙원’도 아니다. 도요타는 2004년 노동자 5백 명을 비정규직으로 고용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 30퍼센트의 노동자가 계약직이다.

GM처럼 망하기 싫으면 도요타처럼 일해라?

당시 언론들은 도요타를 칭송했다. 현대차 노조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기사 제목처럼, GM처럼 망하기 싫으면 도요타처럼 일하라는 것이 현대차 노조에 대한 주문사항이었다. 다음 기사를 보자.

지난해 1조엔이 넘는 순이익을 거둔 도요타가 기본급 인상을 4년째 동결한 것도 눈여겨 봐야할 대목이다. 현대차와는 근로조건과 시간 등이 달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엔 무리라는 지적도 있지만, 도요타 노조는 지난 2002년 사상 최대의 이익을 내고도 임금동결에 전격 합의했다. 그리고 2003년과 지난해에도 기본급을 올리지 않았다. 도요타 노조가 내몫찾기를 자제하는 이유는 장기 고용안정을 보다 중시하고, 투자 여력을 만들어 국제경쟁에서 앞서가기 위해서라고 한다. 지난해 도요타의 연구개발 투자비는 6조7천억원으로 현대차의 5배에 이른다.

이 내용은 맨 앞에 인용한 한겨레 기사와 딴판이다. 도요타가 노사상생을 잘 실천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현대차는 이걸 보고 배우라고 얘기하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기사는 어떤 신문의 것일까? <한겨레>의 2005년 8월 25일자 기사, “GM대우·도요타서 ‘상생’ 배워라” - 파업 연례행사…현대차 11년 노사분규에 나온 내용이다. 4년만에 논조가 180도 바뀐 것은 어리둥절하다.

여기서 <한겨레>의 본질적 한계에 대해 논하는 것은 내용이 너무 많아 진다.

<조선일보>는 두말하면 잔소리. 신문도 아닌 찌라시에 트래픽을 주기 싫어 링크걸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워낙 가증스런 기사라 사람들도 좀 보길 바라서 기사 링크도 함께 건다.

현대차와 도요타 노조는 ‘회사관(會社觀)’부터 다르다. 도요타 노조는 ‘협조와 상생(相生) 관계’인 반면 현대차 노조는 ‘투쟁과 쟁취 대상’으로 본다. 도요타 노사는 믿고 화합하지만 현대차 노사는 그러질 못한다.

현대·도요타차의 너무나도 다른 노조, <조선일보> 2005.05.22

한 마디로 어이가 없으심이다.

경제 위기와 노동자 투쟁, 그리고 이 사회

<한겨레>의 흥미로운 기사를 보고 글을 쓰다가 길어졌다.

몇 년 전 주요언론들의 근시안적 기사와 오늘 올라온 기사를 비교해 보면서, ‘다함께’를 비롯한 사회단체들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깊이 새겨들을 만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개인적으로 나는 ‘다함께’ 지지자이며 <레프트21> 애독자다.)

아울러 든 생각이 또 있다. 경제 위기라고 한다. 이 사회 권력층은 언제나처럼 서민들에게 허리띠를 졸라 매라고 주문한다. 당장 노동자들 임금부터 줄여야 한다고 한다. 노동시간도 늘리길 원한다. 이 근시안적인 인간들은 복지를 통한 선순환은 애당초 생각하지도 않는다. 자기들 이윤을 조금이라도 갉아먹는 것은 절대로 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당장 경기도의회가 무상급식에 딴지거는 것을 보라. 경기도의회는 한나라당이 다수당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복지를 요구하는 것은 자신들의 생활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전체 사회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노동자들의 원자화되고, 갈 데 없는 분노를 단결된 투쟁을 통해 건설적으로 표출하는 게 아니라 이리저리 표출하면 사회는 엉망이 될 것이다. 지나친 노동강도 강화로 자동자가 망가지면 교통사고가 난다. 자동차만 그럴까? 사회 전체는 망가지지 않을까?

100년 전 독일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가 변혁 아니면 야만으로 끝을 맺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요타 사태는 전체 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작은 사례에 불과하지만, 이것은 더 큰 미래를 보여 주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가 파국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