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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공산주의와 파업

들어가기 전에 한 마디 해 둘 게 있다. 나는 여기서 ‘사회주의’란 말과 ‘공산주의’란 말을 동의어로 사용한다. 왜 그런지 궁금한 분들은 내가 쓴 글 ‘사회주의/공산주의는 개인 소유 자체를 부정하는가’의 앞부분을 읽어 보기 바란다.

내가 사회주의자도 되기 전의 일이다. 나는 그 전에 간디의 사상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뭐, 간디주의자쯤 해 두자. 민중신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아실랑가 모르겠지만 함석헌 선생님이 내시던 잡지 《씨알의 소리》가 여전히 나오고 있었고, 나는 그 잡지를 늘 구입해 읽었다.(!)

나는 폭력으로 바꾼 세상은, 폭력으로 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즉, 폭력혁명은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폭력을 행사하며 세상을 바꾸는 과정에서 세상을 바꾼 주체 자신이 폭력으로 인해 변질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건 구체적인 과정을 무시하는 일종의 ‘운명론’이다. 물론, 역사에서 이를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 폭력을 통해 이룩된 체제가 비폭력적으로 확립된 사례를 들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당방위’가 폭력인가 아닌가 하는 논의로 들어가면 내가 좀 단순하게 생각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혁명의 방법론은 파업?

그런데 어느날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사회주의로 가는 길은 파업이라는데?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던 거랑 많이 다르지 않어?”

어라? 내 머리는 한 순간에 새로운 지평으로 들어섰다. 유혈혁명이 아니라 파업이라- 매력적이었다.

△KBS 파업 집회 모습.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데 어찌 아니 매력적일까.


나는 노동자 파업 옹호론자였다. 수많은 게시판[각주:1]에서 파업이 이기주의니 하는 주장에 맞서서 내 의견을 개진하는 과정이 있었다. 파업권은 생존의 마지막 보루, 혹은 인간의 권리로서 내 머리속에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따라서 내 개념상 파업은 폭력이 아니었다. 파업을 부수는 것이야말로 폭력이었다. 파업으로 노동자들을 내모는 과정이야말로 구조적 폭력이었다.

내가 사회주의로 가는 방법이 파업이라는 말에 강렬한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 그런 나의 사고과정에 있었다.

노동자 투쟁의 원리

내가 사회주의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편견’ 때문이었다. 사회주의는 모종의 폭력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라는, 이 체제가 악선동해 온 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노동자 투쟁의 원리에서 차분히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의 하나다. 따라서 노동자 투쟁을 지지할 수 있다면 사회주의를 지지할 수 있는 최초의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 투쟁의 원리는 간단하다. 견디다 못한 저항이다. 

노동자들이 견디다 못해 저항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가 왜 가능한지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논의에서 출발을 이룬다.

올해 설립된 이화여대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조건을 보자.

이화여대 미화노동자들은 아침 6시에 출근해 하루 종일 거대한 건물을 청소하고, 담당 건물 외에도 “서비스 차원”으로 외곽청소(잡초 뽑기, 낙엽 쓸기, 눈 치우기 등)까지 한다. 학교에서 하루 10시간 이상을 보내지만(종일반 기준) 기본적인 식대도 나오지 않고, “불이 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전기밥통조차 사용하지 못하게 해 “쥐가 다닐 것 같은 휴게실에서 찬밥 도시락을” 먹는다. 일방적인 업무 전환배치와 반복되는 재계약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이렇게 일해서 받는 돈은 한 달에 고작 78만 원이다.

성지현(이화여대 학생), 노조를 만들어 권리 찾기에 나선 이화여대 미화노동자들,
레프트21, 2010.1.30

위와 같은 노동조건에서 일한다는 거,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말하기 어렵다. (물론, 우리 사회 노동인구의 50% 이상이 위와 같은 혹은 유사한 상황에서 일한다는 점을 밝힌다. 아마 그런 조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내 블로그 글을 읽을 기회도 훨씬 적을 것이다.)

어떤 환경미화 노동자들은 밥 먹을 공간이 없어서 화장실 대변보는 칸에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밥을 먹다가 사람이 들어와서 변을 보면 밥 먹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숨죽였다고 한다.

△이화여대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휴게실. http://blogs.ildaro.com/652


아마 말도 여러 번 했을 것이다. 견디다 못해 때려 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남은 사람들은 “그래도 여기가 낫지” 하는 생각으로 버텼을 것이다.

그러다가, 견디다가 견디다가 못해서 하는 저항, 바로 그것이 노동자 투쟁의 원리다.

파업, 총파업, 혁명

위에서 든 이화여대의 사례는 일개 대학당국에 맞선 투쟁이다. 물론, 위 투쟁의 성격은 사회적이다. 비정규직화의 결과로 피폐해진 노동자들이 저항에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모로 본다면 사회적이지 않다. 

당연하다. 이화여대 환경미화 노동자들이 저항에 나서는 데 핵심적이었던 것은 이화여대 당국의 대우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경제 위기를 살펴보자.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서 경제 위기는 필연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밝힌 것이며, 바로 이것이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논할 때 가장 큰 주춧돌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끊임없이 발전해 나간다면, 자본주의 내에서 사회를 개혁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위기를 겪는다. 그리고 위기 때마다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공격한다. 간단하다. 돈을 뽑아먹을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수단이 노동자들의 돈을 뺏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분석은 현실에 기반한 것이다. 한국에서 생생한 사례가 펼쳐지고 있다. 레프트21 기사를 보자. 

경제가 회복하는 듯 보이자, 이명박 정부와 보수 언론들은 국가 부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 정부 부채보다 공기업 부채가 급증하자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중략) 토지주택공사 부채가 2009년에만 23조 5천억 원가량 늘어났는데, 이는 행정도시, 경제자유구역, 혁신도시 건설 등 정부의 경기 부양 사업을 토지주택공사가 떠안았기 때문이다.

수자원공사도 4대강 사업 때문에 1조 원가량 부채가 늘어났고, 철도공사는 적자 상태인 공항철도를 인수해야 했다.

(중략) 이명박 정부는 한국전력과 가스공사 등의 적자를 이유로 올해 하반기부터 전기, 가스 등의 요금 인상도 추진하려 한다. 이렇게 되면 경제 위기로 임금이 삭감돼 고통을 겪은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질 것이다.

세계 각국 정부는 기업을 지원하느라 급증한 공공부채의 책임을 공무원 임금 삭감, 교육ㆍ복지 예산 삭감, 간접세 인상 등으로 노동자ㆍ서민에게 전가하고 있다.

강동훈, 한국 경제 - 회복 뒤에 도사린 불안정, 레프트21, 2010-05-08

구체적인 예가 하도 많아서 다 인용할 수가 없다. 여튼간에, 그래서 경제 위기는 저항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지금 그걸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는 사례가 그리스 노동자들이다. 그리스 노동자들은 올해 들어서만 벌써 7차례의 하루 총파업[각주:2]을 벌였다.

총파업 - 회사가 아니라 국가

자, 이제 생각해 보자. 이화여대 당국은 왜 환경미화 노동자들을 저렇게 비인간적으로 부려먹었을까? 내가 아는 사례인 고려대의 사례를 보면 해답이 나올 법하다.

IMF가 왔고, 대학들도 긴축을 해야 했다. 대학 당국들은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어디서 비용을 줄일까?’ 노동자 임금을 깎을까 총장 해외 출장비를 깎을까?[각주:3] 

해답은 ‘쉬운 노동자’ 임금 깎기였다. ‘쉬운 노동자’는 일단 환경미화원 경비원이었다. 그전까지 직영이던 환경미화원들은 외주화됐다. 임금은 100만 원에서 48만 원으로 깎였다. 5명이 일하던 곳에 3명만 배치됐다.

그래서 참다못해 고대에서도 2004년에 환경미화노조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경제 위기가 모든 노동자들에게 비슷한 것을 강요한다면? 저항은 전 사회적인 차원으로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리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 정부는 공무원 “연금 수령액을 삭감하고 여성 공무원들이 현재보다 15년을 더 일해야 은퇴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3년 동안 임금이 동결되고,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상여금이 사라지고, 각종 복지 혜택이 축소될 판이다. 부가가치세는 23퍼센트 인상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국가가 노동자들에게 전면전을 선포하는 때, 그런 때가 있다.

이 때 노동자들이 (외딴 섬의 유적지 관리인까지 포함한[각주:4]) 전국적 총파업을 벌이는 것은 ‘공격’인가 ‘정당방위’인가? 이것은 개인에게나 사회에나 심각한 물음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정당방위라고 말한다.

△이것은 공격인가 정당방위인가?

무기한 총파업

여기서부터는 역사상 몇 차례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다루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역사상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이다. 가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언도 아니다. 예상도 하니다.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유비하는 것이다.

하루 총파업은 훌륭한 저항이지만 가장 강력한 저항이 되지는 못한다. 하루 총파업에 국가와 사장들은 깜짝 놀라지만, 하루만 견디면 된다. 이명박이 촛불에 대해 비가 올 땐  처마 밑에 있으면 그만이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엄청난 위기의 시대에, (그리고 지금이 그런 시기인데) 국가와 사장들은 깜짝 놀라는 것만으로는 양보하기 쉽지 않다.

왜 국가와 사장들은 양보하지 않을까?

<이웃집 남자>라는 영화를 본 사람은 알 거다. 주인공은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땅투기를 하는 부동산 업자다. 그런데 환경 파괴에 반대하는 초등학교 교사가 지역 개발에 반대한다. 그래서 공사가 늦어진다. 주인공에게 돈을 맡긴 사람들이 돈을 날릴까봐 걱정한다.

주인공과 내연관계인 한 돈 많은 여자는 제발 투자해 달라는 주인공을 외면한다.

어떤 ‘사장님’은 주인공을 별장으로 납치해 수천 도의 온도로 불타고 있는 벽난로를 보여 준다. 사장이 고요안 건달들은 주인공을 난로에 집어 넣으려고 한다. 주인공은 살려달라고 소리친다.

그래서 주인공은 강해진다. 초등학교 교사의 약점을 잡는다. 그리고 그를 자살로 몰아넣는다. 초등학교 교사가 죽고, 개발이 진행되고, 주인공은 돈을 벌지만 입맛이 쓰다.

주인공은 나쁜 사람이었을까? 나쁜 사람이다. 착한 사람일까? 나름대로 착한 맛도 있다.

하지만 주인공의 사회적 역할은 나빴다. 사람이 좋냐 나쁘냐는 사회적으로는 중요하지 않다.(가족이나 친구에게는 중요할지 몰라도 말이다.)

왜 그랬을까? 주인공은 실제로 죽을 뻔했다. 맞다. 죽느냐 아니면 한 탕 크게 치느냐. 그게 인생이다? 아니다. 그게 자본주의다. 그게 사장들의 자본주의다. 그래서 사장들은 노동자들을 쥐어짠다.

이런 사장들에 맞서다 보면 자연히 물음이 나온다. 하루 총파업보다 강력한 무기는? 간단하다. 무기한 총파업이다. 버스 한 대도 다니지 않는 도시가 무기한 지속된다. 국가와 사장들은 드디어 미치고 환장할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버스도 안 다니고, 운송도 안 한다? ㅡㅡ;; 노동자들은 어찌 살아가나... 밥은 먹고 불은 켜야 할 텐데.

무기한 총파업이 일주일 간다면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달 간다면 문제다.

역사상 무기한 총파업들은 모두 전국적 파업위원회를 갖췄다. 러시아의 소비에트, 독일의 레테, 이란의 쇼라, 칠레의 코르돈 등등. 그리고 바로 이 기관들이 최소한의 생필품 공급, 연료 공급, 대중 교통을 책임졌다고 한다.

다음 질문 - 이게 사회 운영 아닌가?

그러면 사상 최초로 노동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사장과 국가가 없는데도 사회는 운영되고 있다!

그렇다. 이것이 사회주의로 가는 첫 번째 가교. 총파업과 노동자 국가의 맹아 탄생이다.

이 글은 파업에 대해서만 다루므로, 여기까지.

  1. 오프라인에서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의 커뮤니티에서 오간 논쟁이기 때문에 생산적이었다 [본문으로]
  2. 한국 민주노총이 하는 식의 ‘가짜’ 총파업이 아니라, 진짜 총파업 하면 버스 한 대, 지하철 한 대도 안 다니는 진정한 의미의 총파업 [본문으로]
  3. 고려대는 회의비 같은 데 수천만 원을 책정한 바 있다. [본문으로]
  4. http://www.left21.com/article/812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