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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위기를 앞둔 전초전, 쌍용차 파업을 곱씹으며

77일 간의 영웅적 투쟁이 막을 내렸다. 이 투쟁의 결과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여기에 말 한 마디 보태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적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쌍용차 노동자들은 너무나 잘 싸웠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으로서, 쌍용차 노동자들은 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했다. 민주노총의 연대 투쟁이 부족했을 뿐. 그리고 이것이 너무나 큰 것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 투쟁을 패배라고 말할 수 없다. 성과만 놓고 봐도 그렇다. 따라서 나는 이 투쟁이 어떤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간략히 짚어 보겠다.

이 글은 레프트21의 전지윤 기자가 쓴 쌍용차 ─ 아쉽지만 선방한 77일간의 영웅적 파업에 대부분 빚지고 있다. 내 글 대신에 저 글을 읽어도 된다. 내 글은 저 글을 발판으로 씌어졌다. 물론 내 견해가 녹아 있으므로 저 글의 단순 변형판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많은 빚을 졌다.

승리인가 패배인가

축구를 봐도, 전쟁을 해도 사람들은 늘상 묻는다. 승리인가 패배인가.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진실은 완승도 완패도 아닌 경우가 많다. 

파업이 끝나고 서로 끌어안은 노동자들

이들에게서 패색을 찾아볼 수 있는가. 처절하고 훌륭히 사운 투사들에게 '패배'를 찾을 수는 없다.

누군가 이렇게 썼다. 저들은 쌍용을 자동차 업체 중 가장 만만한 상대로 보고 정리해고를 단행했다가 쓴 맛을 봤다고. 결국 그 '만만한 상대'를 상대로 경찰 특공대와 헬기까지 동원한 후에야 껍데기뿐인 '승리'를 얻어냈다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저들은 물리적으로 노동자들을 패대기쳤다. 쓰러진 노동자를 곤봉으로 후려치고, 방패로 찍고, 발로 밟고 섰다. 그러나 그들이 얻은 것은 수백만의 분노다. 어쩔 수 없이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의 불타오르는 적개심이었다.

973명? 숫자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사측은 이 모두를 정리해고하려 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정리해고할 수 있게 된 사람은 이 절반즈음.

이 절반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승리라고 하기에는 모자라고, 패배라고 하기에는 뭐한... 그러나 진한 아쉬움을 남기는 뭔가가 이 숫자에 들어 있다.

그래서 나는 <레프트21>의 기사에 나온 '선방'이란 표현이 맘에 든다.

무엇을 선방했나

이 투쟁은 선방이었다. 브라질 대표팀과 이라크 대표팀이 축구를 했다고 치자.(한국은 꽤 강해졌고... 딱히 팀이 생각 안 난다;;) 1:0으로 이라크가 졌다고 하자. 선방이라고 할 것이다. 이번 투쟁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처절한 비유를 들어 보자. 영화 <300>에서 몰살당한 300의 전사들(이 영화 쫌 냉전주의적이라 맘엔 안 들지만)은 패배했는가 승리했는가. (물론 쌍용차가 몰살당하지는 않았다.) 쌍용차 투쟁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아주 똑같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겠다.)

쌍용차에 최루액 투하하는 경찰 헬기

최루액 세례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무릎꿇지 않았다.


양측의 사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전초전이라는 점에서는 영화 <300>과 좀 더 비슷하고, 선방이라는 점에서는 앞서 든 축구의 예와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한마디로 쌍용차 투쟁은 전초전을 선방해냈다는, 세계 대공황의 초입에 있었던 중요한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초전 선방의 의미

어찌보면 감정 섞이지 않은 단어로 이루어진 이 평가가 냉정해 보일 수도 있겠다. 좀 더 뜨거운 연대를 담은 표현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한다. 이 투쟁의 의미를 정확히 평가하면서도 감정을 실을 수 있는 단어. 그러나 나는 시인이 못 되는 관계로 그런 좋은 단어를 고를 능력이 부족하다.

다만, 감정 섞이지 않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내 심장이 쌍용차 투쟁 앞에서 아무 울림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고 싶다. 내가 쌍용차 글로 최근 블로그를 도배하다시피 했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법 개악에 대해서도 쓰고싶었는데 도저히 쌍용을 제끼고 미디어법을 쓸 수가 없었다. 제한된 시간과 감정의 문제 때문이었다. 좀 더 냉철히 판단했다면 미디어법 문제를 썼을 텐데 말이다.)

경제 위기는 정리해고를 낳을 것이다. 이명박도 정리해고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알만한 사람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행동지침을 끌어내는 것은 누구나 하기는 어려운 일인 듯하다.

한마디로, 노동자들 - 특히 대형 노조의 노동자들은 죽을둥 살둥 싸워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계급 전체의 이익을 지킬 수 있다. 아직은 금속노조 노동자들이 위기감을 깊이 느끼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선진국 경제 위기를 등에 업고 자동차가 호황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거품은 곧 꺼질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금속노조의 양대 마차라고 불리는 현대와 기아에 대해서도 구조조정의 칼날이 휘몰아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양대 노조의 노조원들 운명만 결정하는 게 아니다. 그건 관련 업계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 나라 노동자들의 방패막이 수준을 가늠해보는 시험장이 될 것이다. 현대 기아 노동자들이 무너진다면 이 나라 전체 노동자들이 무너질 수 있다. 그리고 쌍용차는 이런 거대한 싸움의 전초전이었다.

부르주아 대 프롤레타리아

마르크스는 이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 경우 은밀한 계급투쟁보다 더 직접화한 드러난 계급투쟁이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권 대 서민의 싸움, 가진 자 대 못 가진 자의 싸움, 이런 구분들이 마르크스의 입장에서는 '계급투쟁'이었다. 나는 이 관점에 동의한다. 굳이 저 낡은 내 풀풀나는 단어를 꺼내어 쓴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한 번 상기시키고 싶었다. 이 싸움이 화해 가능한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혹자는 탐욕 때문에 이런 싸움이 끊임없이 벌어진다고도 한다. 혹자는 가진 자들이 워낙 또라이고,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다. (물론 내 생각에도 우리나라 지배계급은 천박하기 짝이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딘가 조금씩은 모자라는 설명이다. 내가 보기에 정확한 설명은, 마르크스의 설명이다. (국가 간, 기업 간) 경쟁 압력에 노출된 부르주아들이 프롤레타리아를 쥐어 짜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것 때문에 벌어지는 투쟁. 당연히 이런 투쟁은 경제 위기 시기에 더욱 거세다. 저들은 프롤레타리아를 더욱 쥐어짜 공황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길 바라니까. 지옥문 앞에서 서로 살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형국이라 할까. 이런 때 노동자들의 저항이 저들 눈에 얼마나 미울까. 그래서 저들은 쓰러진 노동자마저 패고, 찍고, 밟았던 것이다.

전초전의 득점 상황

저들은 일치단결해 쌍용차 노동자들을 짓밟았다. 우리 편이라 할 수 있는 민주노총은 이렇다 할 세력을 동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자들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저들에게 '자비'를 구했다.(마지막 날까지 협상에 매달려 안 찾아가 본 곳이 없다고 자랑스레 말한 금속노조의 정갑득 위원장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쌍용차 노동자들 앞에 고개를 들 수 있는가.)

총 공세를 감행하는 적군 앞에 노출된 선발대. 그런데 본대는 이 선발대를 구하려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전령을 보내서 적군에게 '협상'을 제시한다. 선발대를 박살내 자신들의 사기를 높이려는 적군 앞에 말이다. 이게 쌍용차 투쟁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우리 편 지도자들은 떠벌리고 다닌다. "우리 군대는 오합지졸이라 본대를 움직일 수가 없어"(노동자들이 싸울 생각을 안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군대를 움직여보려는 진지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적들의 자비가 자신들을 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다행히도 우리편 선발대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워 절반이 살아남고 적들이 퇴각했다. 그러나 절반이 죽었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래서 우리편의 사기는 어느정도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알게모르게 벽에 부딪힌 느낌이 엄습한다. 이 불안정한 하모니가 바로 현 상황이다. 전쟁에 비유한다면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거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레프트21> 전지윤 기자의 글은 이렇게 끝맺는다. 

경제 위기 속에 체제에 맞서기보다 협상과 양보에 기울고 노동자 연대보다는 부문주의를 부추기는 노동조합 상층 지도부를 압박하거나 그들을 뛰어넘는 투쟁을 건설하기 위한 현장 노동자와 투사 들의 네트워크를 건설해야 한다. 이런 네트워크가 단지 경제적 투쟁뿐 아니라 정치적 투쟁에도 나설 수 있도록 개입해야 한다. 이런 개입과 선전ㆍ선동ㆍ조직화가 효과적일 수 있으려면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조직도 동시에 건설해 나가야 할 것이다.

수많은 노동자와 피억압 대중이 이번에 쌍용차의 투사들이 보여 준 것 같은 투지와 용기를 가지고 싸울 수 있도록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와 조직을 발전시켜야 한다.

강조는 내가 한 것이다. 기자는 두 가지를 말했다. 정치와 조직. 그리고 조직으로는 두 가지를 말했다. "사회주의자들의 조직"과 "현장 노동자와 투사 들의 네트워크".

노동조합 관료주의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흔히 두 부류로 나뉜다. 적개심과 절망.

둘 다 틀렸다. 끈질긴 설득.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한 투쟁, 두 투쟁, 세 투쟁, 네 투쟁, 다섯 투쟁, 여섯 투쟁, 일곱 투쟁, 여덟 투쟁, 아홉 투쟁, 열 투쟁, 그리고 그 이상의 여러 투쟁... 이런 투쟁들을 통해 하나씩 입증해 가며 더 효과적으로 싸우는 게 무엇인지 노동자들을 설득해 가야 한다.

그래서 계급 속에 뿌리박은 정치적인 조직(단순히 노동자라는 경제집단의 이기주의를 실현하려는 집단이 아니라, 민중의 호민관이 되려는 그런 노동자들의 조직이라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긴 과제다. 몇 개월만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몇 년이 걸릴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말하고 싶다. 쌍용차 투쟁을 보고 분개하는 이들이여, 공부하라. 그리고 좀 더 많은 투쟁에 참가하라. 그래서 단순히 그냥 싸우지 말고, 어떤 점이 모자랐고 어떤 점이 좋았는지 분석하라.

온갖 왜곡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거대한 정신은 살아남아 여전히 웅변하고 있는 혁명의 거장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레닌에 대한 왜곡은 스탈린과 서방의 적대자들에 힘입은 바 크다. 스탈린은 레닌의 후계자가 아니라 철저한 반대자다.)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투쟁 없다."

지금 상황에 이렇게 적절히 번역해 보면 어떨까 한다. "제대로 된 이론 없이 제대로 된 투쟁 없다." 이론은 단순한 '책상머리들이나 하는 나불거림'이 아니다.(그런 이론이 오늘날 대부분을 차지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이론은 사태를 더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그래서 권하고 싶다. 공부하고, 활동하라. 교훈을 곱씹으라. 그래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