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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민주국가 유럽에 대한 환상

△ 2001년 G8 정상회담 반대 시위에서 경찰에 살해당한 이탈리아 청년 카를로 줄리아니.
이탈리아 총리 베를루스코니는 30만 명이 모인 이 시위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출처 : 울산노동자신문

우리는 흔히 유럽을 민주적이고 복지체계가 잘 이뤄진 국가라고 생각한다.

일단 이것은 사실이다. 유럽은 한국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고, 훨씬 더 복지체제가 잘 갖춰져 있다. 프랑스 택시기사였던 홍세화가 아무 어려움 없이 자식교육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에는 환상이 끼어들 여지가 있다. 이 환상은 홍세화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론에 내재한 함정이다. 이 말이 사람들에게는 유럽의 보수는 상식적이라거나 유럽의 보수는 한국의 보수와 같지 않다는 말로 치환돼 인식되는 것이다.

그럴까? 그런 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면도 있는 것이 문제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동시에 ‘원인’ 대접을 받으면 그 분석은 틀린 분석이고 실천적 결론도 틀리게 된다.

무엇이 다를까? 유럽의 보수는 강력한 유럽의 시민운동과 노동운동 전통 위에서 통치하고 있다. 그 점이 한국의 보수와 다르다. 홍세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전범처럼 예를 들곤 하는 유럽 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오랜 역사과정을 통해 민중의 비판과 견제를 받아들이는 편이 민중 지배를 더욱 용이하게 한다는 점을 인식함으로써 그것을 하나의 문화로 정착시킨 것으로 봐야 한다. (<한겨레> 2004년 2월 12일자)

(다만, 홍세화는 유럽의 보수가 자기성찰 능력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한국의 보수와 유럽의 보수를 구분지을 수 있는 뒷문을 열어 놓는다.)

사실 유럽의 보수도 언제나 시민들을 통제하고, 공격하고 싶어한다. 유럽의 보수도 시민들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보수와 같다.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는 1968년 혁명 40주년이 되던 올해 초 1968년 혁명의 유산을 모두 청산하겠다고 말했다. 이게 저들의 본심이다. 2005년에는 이민자 차별 때문에 폭동이 벌어졌는데 억압적 상황에 대한 증언이 오늘날 한국처럼 생생하다.

즉, 한국의 보수와 유럽의 보수는 본성은 같고 행동양식은 다르다. 유럽 보수의 행동양식이 다른 것은 강력한 시민사회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때로 그 본성이 드러날 때가 있으니 위기의 시기다. 그리고 요즘, 점점 더 그렇게 되고 있다. 다음은 <레디앙>의 한 기사에서 일부 인용한 것이다.

나이가 많은 LCR의 원로 당원 가운데 한 사람은 "나는 70년대에 감옥을 세 번 갔다 왔다. 그리곤 80년대부터 지금까진 프랑스에서 정치사상범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시 감옥에 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노조운동으로, 정치운동으로...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위기를 보여주는 단면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박지연, "생존 위해 반자본주의 정당 불가피", <레디앙>)

노조운동과 정치운동으로 감옥에 가는 사람이 생기고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 프랑스의 최근 변화다.

△ 그람시는 지배계급은 동의와 폭력으로 통치한다고 분석했다.

여기서 나는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맑스주의자) 그람시의 분석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저들은 동의와 폭력으로 지배한다.

(그람시는 폭압국가 러시아와는 다른 양상의, 잘 정비된 서구 사회에서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던 마르크스주의자(맑스주의자)다.)

저들은 동의시키기 힘든 위기의 시기가 오면 폭력의 막대기를 꺼내들기 시작한다. (단, 동의시켜서 통치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 한국의 어떤 멍청한 놈그람시를 들이대며 분석할 필요도 없다.)

덧붙임) 참, 요즘 박노자 선생과 ‘다함께’ 일부 회원들 사이에 혁명이냐 급진적 개혁이냐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박노자 선생은 노르웨이를 기준으로 사태를 분석하며 아무도 혁명을 원치 않는다고 쓰고 있지만 오히려 프랑스나 미국 같은 곳으로 눈을 돌려 보면 주류 서구 사회도 위기가 꽤나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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