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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여전히 유용한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

버거킹 노동자. 헌법을 보면 사장과 노동자는 평등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것이 계급이다.

계급에 대한 오해

많은 사람들이 계급을 낡은 개념으로 여긴다. 심지어 노동계급이 감소하고 있다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이 중간계급이 됐다는 거다.

《혁명만세》에서 계급 개념에 대해 날카롭게 짚은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저자인 마크 스틸은 이렇게 설명한다.

오늘날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휴대용 컴퓨터와 핸드폰 … 이런 발명품들이 그들의 삶을 보다 편안하게 만들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보다는 출퇴근하는 동안에도 일을 해야 하는 사무직 노동자로 만들었다는 편이 더 옳다. 19세기 방직공장 노동자들도 그렇지는 않았다. 그들이 퇴근하면서도 계속 베틀을 휴대하고 빙빙 돌려야 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대부분의 비제조업 일자리들은 ‘중간계급’이란 호칭에 어울리지 않는다. 버거킹에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이렇게 외침으로써 카운터의 직원을 얼떨떨하게 만드시려는가? “당신은 당신이 그건 줄 알지, 응? 이 거만한 중간계급 속물아!”

《혁명만세》 40p

서비스직은 노동계급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계급 개념을 라이프스타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건 막스 베버의 접근인데, 계급을 여러 단계로 만들어놔서 헷갈리게 될 수도 있다. 마크 스틸은 이렇게 말한다.

계급이란 개념은 라이프스타일 혹은 패션과도 연관될 수 있다. 축구하러 다니는지, 아니면 극장에 다니는지? 내린 커피를 마시는지, 아니면 설탕 네 스푼의 홍차를 마시는지? 이 중 당신이 원하는 쪽 어디든 선택할 수 있으며, 나아가 대략 6개월마다 한 번씩 다른 계급으로 바꿀 수도 있겠다.

《혁명만세》 40p, 강조는 mytory

막스 베버식 계급 개념은 설명을 위한 설명일 뿐이다. 마크 스틸이 비꼰대로, 그 설명에 의하면 ‘대략 6개월마다 한 번씩 다른 계급으로 바꿀 수도 있겠다.’ 분류는 재미삼아 하는 게 아니다. 필요에 따른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가 계급으로 나뉜 것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되거나 사회 파멸의 원인이 됐다고 썼다.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세습 귀족과 평민, 남작과 농노, 동업자 조합원과 직인, 요컨대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부단히 대립했으며,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끊임없이 투쟁을 벌여왔다. 이 투쟁은 항상 전체 사회의 혁명적인 개조로 끝나거나 투쟁계급들의 공동 몰락으로 귀결되었다.

카를 마르크스ㆍ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선언》, 책세상, 2005, 16p, 강조는 허대수

계급 개념은 이런 설명을 위한 것이다.

계급 ─ 사회 구성 방식

계급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존 몰리뉴가 쓴 다음 글에 잘 나와 있다.

맑스주의 계급론을 더 제대로 이해하려면 세 가지 요점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첫째, 사회의 생산관계는 하나의 전체인 특정 생산체제를 이룬다는 것과 계급은 이 체제 전체에서 그것이 하는 구실에 따라 규정된다는 것이다. 개별적 경우[개인의 사례]가 아니라 체제 전체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둘째, 계급은 사람과 사물(생산수단 ― 토지ㆍ기계ㆍ공장 등) 사이의 관계 문제일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 문제이기도 하다. 즉, 계급은 서로 충돌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

셋째, 그런 충돌의 원인은 시기심이나 라이프스타일의 차이, 심지어 단순한 불평등이 아니라 착취적 생산관계, 즉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노동에서 잉여(이윤)를 체계적으로 수취하는 것 때문이다. 계급투쟁은 생산과정 상의 착취에서 비롯하고, 거기에서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된다.

계급이란 무엇인가?(존 몰리뉴, 〈맞불〉 15호, 2006.10.14)

몰리뉴의 위 글은 맑스주의 계급 개념에 대한 정교한 글이다.

둘이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열심히 일하는데, 한 쪽은 수백억을 벌고 한 쪽은 월 88만 원을 번다. 생산 수단을 통제하는가 못하는가 차이 때문이다. 자본이 있으면 공장, 원료, 노동력 등을 구입할 수 있다.

생산수단이 없어도 노동과정을 통제하는 관리자가 있고 관리자를 통제하는 자본가도 있다. 생산에 기여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체제 전체에서 생산에 기여하는 것 같기도 한, 미심쩍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하나하나 나눌 수 없다고 너무 골치아파할 필요는 없다. 맑스주의는 이런 식으로 모든 사회집단을 하나하나 구분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대략 이렇게 이해하면 쉬울 거다. 사회 전체가 마치 자석 N극과 S극에 좌악 늘어선 철가루처럼, 완전히 딱 잘라 구분하긴 좀 그렇지만, 분명히 구분되긴 하는 그런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 양 극에서 한 쪽은 자본을 소유해 착취를 하는 쪽이고 다른 쪽은 노동력을 소유해 그걸로 먹고 사는 쪽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른 사회세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양 극쪽에 의존해야 한다. 최하위관리직은 거의 노동계급일 수도 있다. 교사는 오늘날 노동계급으로 공인받았다. CEO는 자본을 소유하진 않았지만 노동계급은 절대 아니다. 이렇게 대략, 어느 편인지 혹은 어느 편에 가까운지 설명할 수 있으면 큰 문제가 없다.

계급 ─ 사회가 ‘개판’인 이유

자본주의는 제도적으로는 계급을 해체했다. 그러나 사회 관계 속에 계급은 여전히 남아있다. 마크 스틸의 설명을 보자.

당신이 어느 보험사의 중역이라면 어느 지점이 개설되고 폐쇄되는 결정에 일정한 영향력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전화 받는 일을 하거나 회사경비원, 혹은 점심시간에 찾아오는 샌드위치 배달부라면 그런 영향력을 기대할 수는 없다. “저는 요리할 때 코리앤더 향신료를 쓰구요, 〈심야리뷰〉 프로그램도 꼭 보니깐, 저를 해고하셔서는 안 되죠”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혁명만세》 40p

이명박이 아무리 욕을 먹어도, 우리는 이명박이 하는 일을 제도적으로 저지하기 매우 힘들다. 이명박에겐 제도적으로 보장된 권한이 있다.

그러나 여론은 무형이다. 제도 바깥에 있는 힘이다. 이것이 실제로 힘을 발휘하려면 지배계급에게 위협감을 줘야 한다. 이런 것이 바로 계급사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회사(자본)는 공적 영역을 담당한다. 대기업이 망하면 전체 사회에 난리가 난다. 한 회사가 노동자 10만 명을 해고한다고 생각해 보자. 끔찍하다. 공적인 것이다.

그런데 자본가들은 그걸 ‘경영권’이라고 부른다. ‘사유재산’이니 맘대로 하겠다는 거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항상 긴장이 발생한다.

상식적으로는 10만 명을 해고하면 안 될 거 같은데, 신성불가침한 ‘사유재산권’이 사람들의 인식 앞에 버티고 선다.

이러니 계급사회라는 거다. 그리고 이런 일에서 피해를 입는 쪽이 바로 피억압계급이다. 이런 일에서 득을 얻는 이명박, 이건희 같은 자들이 지배계급이다.

지배계급이 물질적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는한, 서민을 위한 정치는 예외적 일일 뿐이다.

계급에 관한 추천 글들

실천가들을 위한 맑스주의 입문 8 ─ 계급이란 무엇인가?(존 몰리뉴)

서평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책벌레 ─ 만인을 위한 자본주의 역사

마르크스에 대한 왜곡을 걷어 낸다(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신화1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