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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 전 러시아 학생들의 학교 안 저항 - 트로츠키 자서전에서 인용

인용자주 : 범우사에서 번역한 트로츠키의 《나의 생애》에서 131~140 페이지를 그대로 인용한 내용이다. 1892년에 일어난 사건이니 120년 전 사건인데, 오늘날과 유사한 면이 많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함께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고, 스탈린과 투쟁을 벌이다가 1928년 러시아에서 추방당했다. 스탈린의 독재와 마르크스주의 왜곡에 맞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보존을 위해 투신하다가 1940년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망명지에서 암살당했다.

법률가식으로 말하면 나는 인생을 살아 오면서 불의에 대한 투쟁에서 비롯되는 충돌을 어릴 적부터 적잖이 경험해 왔다. 바로 이런 것이 동기가 되어 친구들과의 만남과 이별이 결정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 수많은 에피소드를 일일이 열거하면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비교적 중대한 의미를 지닌 학교에서의 두 가지 사건만 소개하기로 하겠다.

가장 큰 충돌은 2학년일 때 프랑스어 교사인 뷔르낭드와의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는 스위스인이었지만 ‘프랑스인’으로 불리고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독일어는 어느 정도 러시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과목이었다. 그 반면에 우리의 프랑스어 실력은 거의 향상된 것이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이 학교에 들어와 처음으로 프랑스어를 배웠고, 게다가 독일인 정착민의 자식들의 경우에는 특히 프랑스어는 습득하기 힘든 언어였다. 뷔르낭드는 독일인 학생들을 가차없이 공격했다. 그가 애호하는 표적은 바케르였다. 바케르는 실제로 성적이 매우 좋지 않은 학생이었다. 그러나 이 때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은 학생이 뷔르낭드가 바케르에게 가장 낮은 ‘1’의 점수를 준 것은 아무리 사정이 있더라도 지나친 처사라고 느겼다. 더군다나 이날 뷔르낭드는 여느 때보다 훨씬 더 사납게 굴고 평소의 두 배쯤 되는 소화제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 자에게 ‘연주회’를 열어 주자” 하고 학생들이 서로 눈짓을 하고 팔꿈치를 찌르면서 소곤거렸다. 나는 이 말에 꽁무니를 빼기는커녕 아마도 솔선해서 가담했을 것이다. 이런 ‘연주회’가 전에도 종종 개최되었다. 특히 악의 어린 우둔함 때문에 다들 싫어하는 미술 교사를 상대로 행해졌다. ‘연주회’란 수업이 끝나고 교사가 출구로 향할 때 그 발걸음에 맞추어 일제히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을 가리켰다. 다만 실제로 누가 가담했는지 알 수 없도록 입을 다문 채 소리를 냈다. 그때까지 뷔르낭드를 상대로 한두 번 실행된 적이 있지만, 그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온건하고 상당히 약한 형태로 행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갖은 용기를 다 짜냈다. ‘프랑스인’이 출석부를 옆구리에 끼자마자, 교실 저 끝에서 시작된 신음 소리가 밀려오는 파도처럼 출구 곁에 있는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나도 내 나름대로 가능한 한 최선을 다했다. 뷔르낭드는 이미 출구를 나서고 있었지만 곧 뒤돌아 서더니 창백한 얼굴로 교실 한가운데로 달려와 우뚝 서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적들을 정면으로 노려 보았다. 소년들른 애써 시치미를 떼고 걸상에 앉아 있었다. 앞쪽에 앉은 소년들이 특히 그랬다. 뒤쪽에 앉응 학생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바스락거리며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뷔르낭드는 30초쯤 우리를 응시하다가 이윽고 출구 쪽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격노한 나머지 그의 연미복의 꼬리 부분이 배의 돛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리고 이 때만은 마음이 하나로 일치된 의기 양양한 신음 소리가 ‘프랑스인’의 뒤를 따라 복도 멀리까지 울려퍼졌다.

다음 수업이 시작될 때 뷔르낭드와 교장인 슈바네바흐, 부학감인 마이어가 교실로 찾아왔다. 마이어는 툭 튀어 나온 눈과 단단한 이마, 둔한 머리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양’으로 불리고 있었다. 슈바네바흐는 시종 일관 러시아어의 복잡한 격변화나 동사 활용과 같은 보이지 않는 암초를 아주 조심스럽게 피해 가면서 서론형 훈시 같은 것을 시도했다. 뷔르낭드는 복수심에서 눈을 번쩍거리고 있었다. 마이어는 퉁방울눈으로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유심히 바라 보면서 장난꾸러기로 알려진 아이들을 큰소리로 부르며 선고했다. “너는 그 소동에 참여한 게 틀림없어.” 어떤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무죄를 주장하고, 어떤 아이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하여 10~15명 정도의 소년이 찍혀 ‘점심을 거른 채’ 어떤 경우에는 1시간, 다른 경우에는 2시간 방과 후에 남을 것을 명받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사면받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나도 이 안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름을 부를 때 뷔르낭드가 열심히 집중적으로 눈길을 던지며 내 동정을 살피는 것 같았다. 나는 사면받기 위해 뭔가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스스로 이름을 대며 나서지도 않았다. 나는 오히려 다른 아이들과 함께 남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조금 유감스러운 기분으로 학교를 떠났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전날의 사건을 거의 잊어버린 채 학교로 가고 있었는데, 교문 앞에서 어제 벌을 받은 급우들을 만났다.

“이봐, 너, 큰일났어. 어제 다닐로프가 너를 마이어에게 밀고했어. 마이어가 뷔르낭드를 부르고, 그 후 교장이 와서 다 함께 네가 주모자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려고 했어.”

나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생활 지도부의 표트르 파블로비치가 나타났다. “교장 선생님한테 가봐” 하고 그가 말했다. 그가 교문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가 내게 말할 때의 어조가 좋지 않은 징후를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연달아 수위에게 물으며 교장실이 있는, 신비로 감싸인 복도를 찾아가 그 문 밖에 섰다. 교장은 내 곁을 지나갈 때 의미있는 듯이 내 쪽을 힐끗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살아 있다기보다는 죽은 기분으로 그곳에 서 있었다. 교장이 다시 방에서 나오더니 “좋아! 좋아!” 하고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좋긴 뭐가 좋아, 좋을 게 뭐 있어 하고 생각했다.

몇 분 뒤에 교사들이 옆에 있는 교무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은 내게 주목하지도 않고 각기 서둘러 교실로 향했다. 크리자노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 은근히 얼굴을 찡그리며 내 인사를 받았다. “얘야, 궁지에 빠지고 말았구나.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어.” 그리고 뷔르낭드는 내가 공손히 인사를 하자 내게 바싹 다가서더니 몸을 구부리고 심술궂어 보이는 약간의 턱수염으로 내 위쪽을 덮어 가리고는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2학년의 수석 학생이 하필이면 불량배라니.” 그러고는 구린내나는 입냄새를 풍기면서 잠시 서 있다가 또다시 “불량배 녀석” 하고 말하고는 등을 돌리고 가버렸다.

몇 분 지나자 ‘양’이 나타나 두 다리를 벌리고 섰다. “정말 교활한 놈이야. 역시 너는 그런 놈이었어” 하고 그는 자못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우리가 뼈져리게 깨우쳐 줄 거야.” 그 후 나에 대한 기나긴 고문이 시작되었다. 나의 출입이 금지된 학급에서는 수업이 진행되지 않고 그 대신 심문이 행해졌다. 뷔르낭드와 교장, 마이어, 학감 카민스키 등에 의해 불량배에 대해 알아보는 최고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뒤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일의 발단은 처벌받은 학생 중 한 명이 방과 후에 학교에 남게 되었을 때 마이어에게 다음과 같이 투덜댄 데 있었다. “저희들이 처벌받는 것은 불공평합니다. 신음 소리를 내고도 방면된 학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B……[브론슈테인, 즉 트로츠키를 가리킨다 ― 옮긴이]는 다른 학생들을 부추기고 자신도 신음 소리를 냈는데도 귀가를 허용받았습니다. 카를손도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설마. 나는 믿어지지 않아” 하고 마이어가 대답했다――“B……는 품행이 방정한 학생이야.”

그러나 카를손――빈네만[트로츠키가 다닌 학교의 따분한 목사 ― 형우]을 오데사 제일의 현인으로 내게 소개한 소년――이 그 증언에 동의하고, 그에 뒤이어 몇 명의 학생도 그렇다고 말했다. 그래서 마이어는 뷔르낭드를 불렀다. 교사들의 격려와 다그침을 받고 서로를 밀고의 견본으로 삼으면서 학급에서 결국 10~12명의 밀고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과거의 모든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B……가 산책할 때 교장 선생님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B……는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B……는 즈미고르드스키 선생님에 대한 ‘연주회’에도 참여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인 바케르는 감동적인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구스타브 사모일로비치[뷔르낭드] 선생님께서 가장 낮은 점수인 ‘1’을 주셔서 저는 울었습니다. 그러자 B……가 다가와 제 어깨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울지 마, 바르케. 우리가 시학관에게 편지를 보내 뷔르낭드의 목을 자르도록 부탁할 게.’”

“누구한테 편지를 쓴다고?”

“시학관에게요!”

“그게 정말이야! 그래서 너는 뭐라고 말했어?”

“물론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닐로프가 이야기를 이어받았다――“그 말이 맞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B……가 교육청의 시학관에게 편지를 쓰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퇴학당하지 않도록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쓰지 말고, 편지의 각 글자를 모든 사람이 차례로 하나씩 쓰자고 했습니다.”

“그래, 알았다.” 뷔르낭드가 혼자서 빙글거리며 말했다――“차례로 각기 한 자씩 쓰자고 했단 말이지?”

학생 전원이 한 사람도 예외없이 심문받았다. 개중에는 있었던 일이든 없었던 일이든 모조리 다 단호히 부인한 소년들도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코스티아 R이었다. 그는 학급의 수석인 가장 친한 친구가 정말 부끄럽게도 배신에 의해 파멸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분루(憤淚)를 흘렸다. 밀고자들은 이렇게 완강히 부인하는 학생들에 대해 내 친구라고 말하며 명예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학급 전체가 공포에 사로잡혔다. 대다수의 소년들이 자신의 세계 속에 틀어박힌 채 침묵했다. 이번만은 다닐로프가 나를 고발하는 선두에 섰다. 그가 무슨 일로든 학급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나는 교장실 앞 복도의, 광택있는 황색 서가 옆에 중죄를 진 국사범처럼 서 있었다. 그곳으로 잇달아 주요 증인을 호출해 피고인 나와 대질시켰다. 마침내 귀가가 허락되고, 이 재판이 끝났다.

“돌아가 부모님께 학교에 오시라고 말씀드려.”

“제 부모님은 먼 시골에 계십니다.”

“그러면 보호자에게 그렇게 말씀드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수석이고, 2위 이하를 아주 멀리 떼어 놓고 있었다. 마이어의 혐의도 내게는 쏠리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나는 땅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게으름과 좋지 않은 품행으로 유명한 다닐로프가 학급 전체와 학교 당국 앞에서 나를 짓밟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나와 그렇게 친하지 않고, 또 다른 경우에는 나의 공감을 그렇게 불러일으키는 타입이 아닌 학생이 모욕을 받았다고 해서 그를 돕기 위해 너무 경솔하게 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학급의 연대를 너무 과잉 기대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포크로프스키 골목으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총괄할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뛰는 가슴을 억제하지 못한 채 말과 눈물을 홍수처럼 쏟아 내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했다. 두 보호자는 그 자신들도 몹시 놀랐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나를 위로해 주려고 애썼다. 파니 솔로모노브나1는 밖으로 나가 교장이나 학감인 크리자노프스키, 수학 교사 유르첸코를 만난 뒤,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 자신의 교육자로서의 경험을 예로 들어가며 설득하려고 애썼다. 이런 모든 일은 내가 모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나는 가죽 가방을 열지도 않은 채 그냥 책상 위에 내팽개치고 내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울적하게 지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났다. 대체 어떻게 결망이 날까? 교장은 이렇게 말했다. “문제를 전면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교직원 회의가 소집될 것이다.” 이것은 위협적인 뉘앙스가 풍기는 말이었다.

그리고 교직원 회의가 열렸다. 모이세이 필리포비치가 결정 사항을 듣기 위해 학교에 갔다. 나는 뒷날 차르의 법정에서 판결을 들을 때보다 훨씬 더 큰 불안감을 느끼며 그의 귀가를 기다렸다.

아래층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철계단을 올라오는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났다. 식당 문이 열리자, 그와 동시에 옆방에서 파니 솔로모노브나가 맞으러 나왔다. 나는 내 방의 커튼을 살짝 올렸다.

“퇴학이야.” 모이세이 필리포비치가 몹시 피곤한 어조로 말했다.

“퇴학이라구요?” 파니 솔로모노브나가 숨을 죽이며 되물었다.

“그래, 퇴학이야.”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낮은 목소리로 모이세이 필리포비치가 확인해 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모이세이 필리포비치와 파니 솔로모노브나를 바라보기만 하고는 내 방 커튼 뒤로 물러났다.

뒷날 여름 방학 때 야노프카의 내 집을 방문한 파니 솔로모노브나는 그 때의 내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퇴학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브론슈테인 도련님의 얼굴이 아주 새파랗게 질려 보고 있기가 무서울 정도였어요.” 나는 울지는 않았지만 심적인 고통으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교직원 회의에서는 퇴학의 형식을 둘러싸고 세 가지 안이 제기되었다. 첫번째 안은 어떤 학교에도 재입학할 권리를 허용하지 않는 퇴학이고, 두 번째 안은 성바울 실과 학교에 복학할 권리를 허용하지 않는 퇴학이며, 세 번째 안은 동교에 복학할 권리가 수반된 퇴학이었다. 결국 가장 관대한 세 번째 처분이 내려지게 되었다.2

이 사건을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나는 이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났다. 내 보호자들은 타격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시켜 가족들에게 미치는 충격이 완화되도록 하기 위해 가능한 한 최선을 다했다. 파니 솔로모노브나는 내 누나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고 양친에게 소식을 전하는 방법과 관련해 몇 가지 사항을 지시했다. 나는 학년말까지 오데사에 머무르다가 여느 때처럼 여름 방학이 되고 나서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미 잠드신 긴긴 밤에, 나는 교사와 학생들 역할도 해가면서 누나와 형에게 사건의 전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형이나 누나에게는 아직도 자기 자신들의 학교 생활의 기억이 너무나 선명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연장자로서 나를 대했다. 두 사람은 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큰소리로 웃었지만, 누나의 웃음 소리가 이윽고 눈물로 변했다. 그녀는 테이블에 엎드려 눈이 퉁퉁 붓도록 한참 동안 울었다. 의논한 결과 나는 1~2주일쯤 어딘가에 가서 지내고, 내가 없는 사이에 누나가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로 했다.3 누나 자신은 이 역할에 상당히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형의 학업이 실패로 끝난 뒤에 아버지의 기대는 내게 집중되고 있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완전한 성공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일주일 뒤에 묵으러 갔던 집에서 친구인 그리샤――오른손만 갖고도 연주회를 열 수 있다는 저 모이세이 하리토노비치의 손자――와 함께 돌아온 나는, 모든 것이 알려진 것을 곧 알아챌 수 있었다. 어머니가 그리샤는 아주 따뜻하게 맞이했지만 나는 완전히 못 본 체 하셨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셨다. 그러나 며칠 뒤에 아버지는 찌는 듯이 무더운 날씨라 들판에서 돌아와 서늘한 그늘 속에서 쉬다가 갑자기 어머니가 있는 앞에서 내게 요구하셨다.

“한데 너 말야. 교장 선생님을 어떻게 휘파람으로 놀려 댔는지 내 앞에서 해봐. 이렇게 했니? 두 손가락을 입에 넣었어?” 아버지는 그 흉내를 내보이더니 돌연 웃음을 터뜨리셨다.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셨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노여움과 뒤섞인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 표정은 ‘그렇게 무서운 이야기를 이렇게 가볍게 이야기해도 되는 거예요?’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개의치 않고 질문을 계속하셨다.

“해봐. 어떻게 휘파람을 불었니?” 그러고는 점점 더 유쾌한 듯이 웃으셨다. 아버지는 비록 크게 낙심하긴 했지만 자기 아들이 수석이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신분이 높은 관리를 휘파람으로 놀려 댔다는 것이 마음에 드신 것이 틀림없었다. 휘파람으로 놀려 댄 것이 아니라 단지 교사를 상대로 조용히, 그야말로 악의 없이 신음 소리를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아머지는 끝까지 휘파람을 고집하셨다. 마침내 어머니가 갑자기 울기 시작하셨다.

여름 방학 동안 나는 시험 준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 사건이 공부에 대한 의욕을 일시적으로 모두 다 빼앗아 가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들뜬 상태로 여름을 보내고, 걸핏하면 불끈 화를 내며 울화를 터뜨렸다. 시험 2주일 전쯤에 오데사로 돌아왔지만, 이곳에서도 별로 공부에 마음을 쏟지 않았다. 그래도 아마도 프랑스어 과목을 가장 열심히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시험에서는 프랑스어 교사 뷔르낭드는 피상적인 질문 몇 가지만 했다. 다른 교사들은 훨씬 더 적은 질문밖에 하지 않았다. 나는 3학년으로의 재입학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3학년 교실에서 나를 배신했던 학생과 나를 옹호해 주었던 학생, 방관했던 학생들 대부분과 재회했다. 이 사건이 오랫동안 나의 교우 관계를 결정지었다. 나는 많은 학생들과 인연을 끊고 말도 하지 않고 인사도 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 대신 곤경에 처했을 때 나를 지지해 준 학생들과는 전보다 더 친해졌다.

이상이 말하자면 내가 겪은 첫번째 정치적 시련이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다음과 같은 그룹이 형성되었다. 즉 한쪽에는 고자질쟁이와 질투심이 강한 그룹이, 그 반대편에는 표리가 부동하지 않은 용감한 소년 그룹이, 그리고 중간에는 중립적이고 늘 동요하는 우유부단한 그룹이 생겼다. 이 세 그룹은 훗날에 이르러서도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 후의 인생에서, 실로 다양한 상황 속에서 여러 번 이런 그룹들을 만났다.


  1. 트로츠키 엄마의 사촌의 부인. 트로츠키는 오데사의 엄마 사촌 집에 묵고 있었다. 엄마 사촌은 지식인이었고 그의 부인은 다른 학교의 교장이었다. 엄마 사촌인 모이세이 필리포비치는 나중에 출판업으로 성공했다고 한다. ― 형우 

  2. 세상에 100년 전 러시아에도 출교(복학 권리 없는 퇴학)가 있었구나. 내가 고려대에서 학생 운동 보복으로 당한 출교는 트로츠키 처분으로 논의된 세 가지 중 두 번째 것에 해당한다. ― 형우 

  3. 나도 그랬는데 ㄷㄷ ― 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