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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가 만난 첫 노동자들과 최초의 혁명 조직

아래 내용은 트로츠키 자서전 《나의 생애》 182페이지부터 196페이지에 있는 내용 대부분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트로츠키가 처음으로 실천적 활동에 개입하게 되는 과정을 인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 노동자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하는 과정이 나는 재밌더라. 처음으로 활동하며 만난 노동자들에 대한 애정어린 묘사, 첫 집회 발언의 떨림, 그리고 노동자 투재의 상승 국면에서 작고 경험없는 혁명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이 감동적으로 묘사돼 있다. 결국 이 작은 조직이 도시 하나를 들어다 놨다 하게 되는 과정에 이르렀을 땐 나도 막 신나더라. 짜르의 강한 억압으로 개혁주의가 자라날 토양이 없었던 점, 19세기 말 급진화 물결에 적절히 올라탔던 점, 저항 이데올로기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마르크스주의가 차지하고 있었던 점 등이 영향을 미쳐서 이런 신나는 경험이 나왔을 테고, 오늘날 한국에서 그대로 재연되는 경험은 아니겠지만, 분명히 참고할 점이 많고 영감을 주는 기록이다. 그래서 보관하려고 전문 인용했다. 중략한 부분도 있는데 한 페이지 반 정도로 매우 적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함께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고, 스탈린과 투쟁을 벌이다가 1928년 러시아에서 추방당했다. 스탈린의 독재와 마르크스주의 왜곡에 맞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보존을 위해 투신하다가 1940년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망명지에서 암살당했다.

젊은 시절의 트로츠키. 아마 이런 모습으로 첫 실천 활동에 나섰을 것이다.

1896년 가을,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것은 가족과의 잠깐 동안의 휴전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기사가 되길 바라고 계셨지만, 나는 큰 매력을 느끼고 있는 순수 수학과 조금씩 나를 사로잡고 있는 혁명 사이에서 아직 주저하고 있었다. 이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심각한 가족적 위기가 발생했다. …

(중략)

나는 계속 오데사에 머무르며 여전히 뭔가를 찾고 있었다. 나는 대체 어떤 것을 찾으려 하고 있었을까? 실은 그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우연히 노동자들과 아는 사이가 되고, 불법적인 문헌을 손에 넣고, 가정 교사를 하고, 직업 훈련 학교의 상급생들에게 비밀 강의를 하고, 여전히 나의 낡은 견해를 고수하려 애쓰면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 나는 가을의 마지막 기선을 타고 니콜라예프로 돌아가 슈비고프스키[사회주의자 정원사]의 정원에 다시 숙소를 정했다.

이리하여 전과 같은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우리는 급진 잡지의 최신호를 검토하고 다윈설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 한편, 막연히 뭔가를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특히 혁명적 선전 활동을 시작하도록 우리를 몰고 간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 자극은 내적인 것이었기 대문이다. 내가 출입하고 있는 인텔리겐차 집단 중에는 진실로 혁명적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 종사하고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차 탁자에서의 끝없는 토론과 혁명 조직 사이에는 광대한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노동자들과 접촉하려면 비밀스럽고 고도로 ‘지하 활동적인’ 방법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이 단어를 진지하게, 그리고 거의 신비에가까울 정도로까지 외경심을 갖고 발음했다. 우리는 마침내 차를 마시며 토론하는 것에서 ‘지하 활동’으로 발길을 내딛게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변화가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정적인 것을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행동을 뒤로 미루는 것을 변명하며 통상 서로 이렇게 말했다. “준비가 필요해.” 그리고 결국은 이것은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명백히 사회의 공기가 다소 변하고, 그것이 급격히 우리는 혁명적 프로파간다의 길로 몰아넣었다. 실은 그 변화가 니콜라예프스키 자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나라 전역에서, 특히 양 수도에서 일어나고, 그 영향이 우리가 있는 곳까지 미치고 있었다.

189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명한 직공들의 대중 스트라이크가 발발했다. 이것이 인텔리겐차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학생들은 대규모의 노동 상비군이 깨어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용기를 얻었다. 여름 방학이나 크리스마스, 부활절 때 수십 명의 학생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 키예프에서 벌어진 대변동에 관한 이야기를 갖고 니콜라예프로 귀성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대학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그리하여 고등 중학교를 갓 나온 젊은이들이 투사로서의 영광을 안고 돌아왔다.

1897년 2월, 베트로바라는 이름의 여학생이 수감되어 있던 페트로 파블로프스카야 요새[페테로파울로 요새]에서 분신 자살했다. 결국 끝까지 진상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이 비극은 모든 사람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곳곳의 대학 도시에서 소요가 발생하고 체포와 유형이 잇따랐다.

내가 혁명 활동에 착수한 것은 이 ‘베트로바 사건’을 계기로 한 시위가 한창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우리 코뮌의 연소한 멤버이자 나와 거의 나이가 같은 그리고리 소콜로프스키와 함께 거리를 따라 걷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역시 우리도 시작해야 돼” 하고 내가 말했다.

“그래, 때가 됐어” 하고 소콜로프스키가 대답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 그거야. 어떻게 해야 하지?”

“노동자들을 찾아내야 해. 아무도 기다리지 말고,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우리 스스로 노동자들을 찾아내고 행동에 나서야 해.”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 소콜로프스키가 말했다―“전에 대로에서 일하는 수위와 알고 지낸 적이 있어. 성서파 신도였지. 먼저 그가 있는 곳으로 가보겠어.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소콜로프스크가 그날로 성서파 남자를 만나기 위해 대로로 갔지만, 그는 이제는 그곳에 없었다. 그러나 소콜로프스키는 그곳에서 역시 같은 종파에 소속된 친구가 있는 한 여성을 발견했다. 소콜로프스키는 면식이 없는 이 여성의 친구를 통해 그날 안으로 몇 명의 노동자와 아는 사이가 되었다. 그 중에 곧 우리 조직의 가장 주요한 인물이 되는 전기 기사 이반 안드레이예비치 무힌이 있었다. 노동자 찾기에 나섰던 소콜로프스키는 무척 흥분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면서 돌아왔다.

“있었어, 찾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들은 진짜야!”

다음날 대여섯 명의 우리 일행은 선술집에 앉아 있었다. 자동 오르간이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소리를 내며 우리의 대화가 국외자에게 들리지 않도록 막아 주었다. 여윈데다가 영리하고 명석해 보이는 얼굴에 염소 수염을 기른 무힌이 왼쪽 눈을 장난치듯 가늘게 뜨고서 아직 콧수염과 턱수염도 없는 나의 얼굴을 호의와 불안감이 뒤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철저한 계산 하에 적당히 말을 중단해 가며 내게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 일을 할 때에는, 내게는 말야. 복음서는 상대방을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갈고랑이 같은 거야. 즉 종교로 시작해 실생활 문제로 들어가는 거야. 지난번에는 슈툰다파 친구들에게 흰 완두콩으로 사회의 진상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었지.”

“흰 완두콩이라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주 간단한 거야. 테이블 위에 흰 완두콩 한 개를 놓고 ‘이것은 차르야’ 하고 말하는 거야. ‘이것들이 대신이나 대주교, 장군 같은 자들이야. 저 너머에 있는 것은 귀족이나 상인 계급이고, 그리고 이 쪽에 놓여 있는 흰 완두콩 더미는 보통 민중이야.’ 그리고 이번에는 가운데에 있는 흰 완두콩을 가리키지. ‘그럼, 대신들은 어디에 있지?’ 그러면 그들이 그 주변에 있는 콩을 가리켜. 즉 내가 만한 대로 그들이 대답하는 거야. 하지만, 잠깐만”―이렇게 말하고는 이반 안드레이예비치는 왼쪽 눈을 완전히 감고 한숨을 돌렸다.

“이쯤에서 내가 그 콩들은 모두 그러모아” 하고 그가 계속 말했다. “그러고는 내가 묻는 거야. ‘자, 말해 봐. 차르는 어디 있지? 대신들은?’ 그러면 그들은 내게 이렇게 대답하지. ‘그것을 누가 말할 수 있겠어? 이제는 당신도 발견할 수 없을 거야.’ … 그러면 내가 말해 주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그 말이 맞다. 요컨대 바로 그것이다. 흰 완두콩을 모두 그러모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반 안드레이예비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찌나 흥분했는지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였다. 이것이 진짜 프로파간다(Propagnda: 선전활동]였다. 그에 반해 우리는 그저 아는 체하며 장래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예측하고 상세히 논하면서 뭔가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자동 오르간이 아직도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지하 활동이었다. 이반 안드레이예비치는 흰 완두콩을 이용해 계급 체제의 메커니즘을 파괴해 버렸다. 바로 이것이 혁명적 프로파간다였다.

“빌어먹을, 다만 문제는 어떻게 그러모을 것이냐 하는 거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냐. 그게 문제야.” 무힌은 조금 전과 다른 말투로 말하며 두 눈으로 나를 엄격히 바라보았다―“뭐니 뭐니 해도 흰 완두콩과 다르니까 말야. 그렇지?” 이번에는 그가 내 대답을 기다릴 차례였다.

그날 이후 우리는 앞뒤 가리지 않고 활동에 뛰어들었다. 우리는 나이든 지도자도 없고 경험도 불충분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곤경에 처한 적도, 어떤 당혹감을 경험한 적도 없었다. 아마도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선술집에서 나누었던 무힌과의 대화에서처럼 저항하기 어려운 기세로 잇따라 일이 전개되어 갔다.

지난 세기 종반경에 러시아의 경제 발전의 중심점이 급속히 남동부 쪽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남부에 잇따라 큰 공장이 지어지고, 그 중 두 개가 니콜라예프에 건설되었다. 그리하여 1897년에 니콜라예프의 공장 노동자가 약 8천 명, 다양한 직종의 직인은 약 2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노동자의 지적 수준도 그들의 임금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높았다. 문맹자가 거의 없었다. 뒷날 혁명 조직이 차지하게 될 위치를, 그 당시에는 국교인 러시아 정교와 싸워 일정한 성과를 올린 [종교] 종파가 어느 정도까지 점거하고 있었다. 큰 정치적 혼란이 없는 가운데 니콜라예프의 비밀 경찰은 아무 활동도 하지 않으며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에 더할 나위 없이 유리했다. 만약 그들이 엄중한 감시 체제를 취하고 있었다면, 우리는 처음 몇 주일 사이에 체포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선구자로서 그 혜택을 누렸다. 비밀 경찰이 눈을 뜬 것은 우리가 니콜라예프의 노동자들을 자각시킨 뒤의 일이었다.

나는 무힌이나 그 친구들과 알게 되었을 때 리보프라는 이름으로 나 자신을 소개했다. 이 최초의 ‘지하 활동적인’ 거싲ㅅ말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실은 이렇게 중대하고 고귀한 사업을 위해 모인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괴로웠다. 하지만 리보프라는 가명이 곧 늘 내게 붙어다니게 되어, 나 자신도 그 이름에 익숙해졌다.

노동자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쪽으로 끊임없이 몰려왔다. 마치 공장에서 우리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다 친구를 데리고 서클에 가담했다. 개중에는 아내를 데리고 오는 사람도 있고, 중년이 넘은 노동자의 경우처럼 자식을 데리고 오는 사람도 소수 있었다. 우리가 노동자들을 찾아냈다기보다 그들이 우리를 발견한 것이다. 아직 젊고 경험이 없는 지도자들이었던 우리는 곧 자신들이 시작한 운동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우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곧 반응이 나타났다. 집과 숲, 강가에서 열린 비밀 독서회나 토론회에 20명에서 25명, 혹은 그 이상의 노동자가 모였다. 지배적으로 많은 숫자를 차지한 것은 임금을 상당히 많이 받는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들이었다. 니콜라예프의 조선소에는 당시 이미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어 있었다. 이 노동자들은 파업에는 관심이 없고, 그들이 바라고 있었던 것은 사회 관계에서의 공정성이었다. 그들 중에는 침례파나 슈툰다파, 복음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특정한 종파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러시아 정교에서 벗어났다는 것뿐이고, 침례교는 그들에게 혁명으로 가는 도정의 일시적인 한 단계가 되어 주었다. 우리와 대화를 시작한 처음 몇 주일 동안은 아직 [종교] 종파적인 표현을 사용하거나 종종 원시 기독교 시대와 비교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말하는 방식이 보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 것을 알고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곧 그것을 버렸다.

그들 가운데 보다 인상적인 일부 사람들이 지금도 눈앞에 서 있는 것처럼 생생히 떠오른다. 중산모를 쓴 소목장이 코로트코프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래 전에 온갖 종류의 신비가들을 다 다루어 본 사람으로, “나는 합리자(합리주의자)야” 하고 진지하게 말하곤 하는 익살꾼이자 엉터리 시인이었다. 그런데 복음파 노인으로 이미 손자도 있는 타라스 사벨리예비치가 백번째로 원시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와 같이 그들도 비밀 모임을 가졌지” 하고 말하기 시작하면, 코로트코프가 그것을 가로막으며 “체, 당신의 신학 따위가 다 뭐야!” 하고 말하고는 머리 위의 중산모를 집어들고 화난 듯이 나무 사이로 높이 내던지곤 했다. 하지만 그는 잠시 기다렸다가 그것을 찾으러 숲속으로 들어갔다. 이 모든 일이 사구(砂丘) 지대의 숲속에서 일어났다.

새로운 사상에 감화를 받아 많은 노동자가 시를 쓰기 시작했다. 코로트코프도 <프롤레타리아의 행진>이라는 시를 썼는데, 그것은 이렇게 시작되었다―“우리는 알파이자 오메가, 처음이자 끝이다.”

알렉산드라 리보브나 소콜로프스카야의 서클에 아들과 함께 참가한 목수 네스테렌코는 칼 마르크스에 관한 노래를 우크라이나어로 만들었고, 우리는 그것을 합창했다. 하지만 네스테렌코 자신의 말로는 매우 딱했다. 그는 경찰과 손을 잡고 조직 전체를 팔아 넘겼다.

젊은 잡역부인 예피모프는 아마색 머리칼에 푸른 눈을 지닌 거한으로 장교 집안에서 태어나 학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말 독서도 열심히 했지만, 바로 ‘밑바닥’이라 부르기에 적합한 도시의 슬럼가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떠올이 일꾼들을 상대로 하는 밥집에서 발견했다. 그는 항구에서 하역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겸손하며 예의도 발랐지만 늘 침울해 보여, 21살밖에 안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확실히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윽고 예피모프가 자신은 ‘인민의 의지’파의 비밀 조직과 관계가 있다고 털어놓고는 나를 그들에게 소개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세 사람―나와 무힌, 예피모프―은 ‘러시아’라는 이름의 소란스런 선술집에서 차를 마시는 동시에 귀청이 터질 것 같은 자동 오르간의 음악을 들으면서 어떤 사람을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내 예피모프가 상인풍의 수염을 기른, 몸집이 크고 뚱뚱한 사람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이오.”

그 남자는 다른 테이블에서 한참 동안 혼자 차를 마시다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입고는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성상화(聖像畵)를 바라보며 십자를 그었다.

“아니! 저자가 ‘인민의 의지’ 파란 말이오?” 무힌이 작은 목소리로 신음하듯 말했다. 그 ‘인민의 의지’ 파 사람은 예피모프를 통해 애매모호한 핑계를 대며 우리와 만나는 것을 피했다. 결국 이 사건의 진상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았다. 예피모프 자신은 곧 석탄 가스로 자살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청산했다. 푸른 눈을 지닌 이 거한은 스파이의 손 안에서 놀아나는 장난감―혹은 어쩌면 훨신 더 악질적인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무힌은 전기 기사였기 때문에 경찰이 덮칠 경우를 대비해 자신의 방에 복잡한 경보 장치를 설치해 두고 있었다. 그는 27세였지만 내게는 거의 노인으로 비칠 정도로 인생 경험이 풍부하고 생활상의 지혜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결핵 환자로 약간 피가 섞인 가래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는 혁명가로 생애를 마쳤다. 첫 유형지에서 돌아온 뒤에 다시 투옥되고, 그 후 또 유형에 처해졌다. 23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다시 그를 만난 것은 하르코프에서 개최된 우크라이나 공산당 협의회에서였다. 우리는 회의장 한 구석에 앉아 오랫동안 과거를 돌아보며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떠올리고, 혁명의 여명기에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의 그 후의 운명에 대해 서로 이야기했다. 이 회의에서 무힌은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중앙 통제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회의가 끝난 직후에 그는 병상에 눕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무힌은 서로 알게 되자 곧 내게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 주었다. 바벤코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도 또한 어느 종파에 속해 있었다. 그는 작은 집을 갖고 있었고, 뜰에는 몇 그루의 사과나무가 있었다. 바벤코는 다리를 절어 움직임이 둔했지만 언제나 냉정했다. 그가 내게 레몬 대신 사과를 넣고 차를 마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도 다른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얼마 동안 감옥에 있다가 그 후 다시 니콜라예프로 돌아왔다. 그러나 운명이 우리를 갈라 놓았다. 1925년에 가서야 비로소 나는 우연히 신문을 읽다가 남부 러시아 노동자 동맹의 예전 멤버인 바벤코가 쿠반 지방에서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그의 두 다리가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다. 나는 아무튼 치료하기 위해 이 노인을 에센투키로 옮기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다(이 상시에는 이미 나로서는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요양소에 있는 그를 방문했다. 그는 트로츠키와 리보프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예전처럼 사과를 넣은 차를 마시면서 추억담으로 꽃을 피웠다. 상상컨대 그 후 트로츠키가 반혁명가라는 말을 듣고 그는 틀림없이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 외에도 흥미롱ㄴ 인물이 많이 있었지만, 너무 많이 일일이 거론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조선소 부설 기술 학교를 나온 훌륭한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단히 교양이 깊어 지도자의 말을 절반만 듣고도 그 핵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혁명적 프로파간다가 아주 엉뚱하게 꿈꾸며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잘 노동자들에게 먹혀드는 것을 발견했다. 그 놀라운 효력에 우리는 감동하고 상당히 도취해 있었다. 우리가 혁명 활동과 관련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프로파간다에 의해 획득되는 노동자의 수는 대개 극히 적다는 것이었다. 혁명가가 두세 명의 노동자를 사회주의자로 바꾸어 놓으면 나쁘지 않은 성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서클에 들어온 노동자, 들어오길 희망하는 노동자의 숫자가 좀 과장해서 말하면 무한한 것 같았다. 다만 지도자가 부족했다. 문헌도 충분히 확보되어 있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구깃구깃해진 낡은 수제 복사본 하나밖에 없어 지도자들이 그것을 서로 빼앗아 가며 읽었다. 이 《공산당 선언》은 오데사에서 많은 사람에 의해 필사되어 다양한 필적이 섞여 있는데다가 탈락된 부분과 잘못 베낀 부분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윽고 우리는 직접 문헌을 만들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면 바로 이것이 내 저술 활동의 기념비적인 첫걸음이었다. 그것은 나의 혁명 활동이 시작된 시기와 거의 겹쳐져 있었다. 나는 성명서와 논문들을 쓰고, 이어서 그것들을 활자체로 젤라틴판[등사판의 한 가지. 간이 인쇄법으로 젤라틴(한천)으로 판을 만듦]에 천천히 옮겨 썼다. 그 당시는 아직 타이프라이터 등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글을 잘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아무 어려움 없이 우리의 성명서를 읽을 수 있을 만큼 또렷하게 만드는 데 자부심을 느끼면서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활자체로 젤라틴판에 글자를 썼다. 한 페이지를 완성하는 데 최저 2시간이 걸렸다. 이따금 일주일 내내 등을 구부린 채 작업에 매달리고, 서클 모임이나 학슴회에 나갈 때만 일에서 손을 뗄 때도 있었다. 그 대신 보라색 잉크로 인쇄된 비밀 전단들을 공장이나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이 탐독하고, 손에서 손으로 전하고, 그것을 놓고 열심히 토론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될 때에는 그 얼마나 만족스러웠던가! 그들은 이 전단들의 작자를 기묘하고 강대한 인물로 상상하고 있었다. 다소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모든 공장에 침투해 직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아내고, 24시간 뒤에는 벌서 그 사건에 대한 견해가 실린 새 인쇄 전단을 뿌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우리는 밤에 자신들의 방에서 젤라틴판을 만들고 성명서를 인쇄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뜰에서 망을 보며 서 있곤 했다. 위험할 경우에는 즉시 증거를 소각해 버릴 수 있도록 뚜껑이 열린 난로에 성냥과 등유를 준비해 주었다. 어느 것이나 다 매우 조잡하고 유치했지만, 니콜라예프의 헌병도 그 당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경험을 축적해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 우리는 직장에서의 불행한 사고로 시력을 상실한 중년 노동자의 아파트로 인쇄소를 옮겼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를 망설이지 않고 마음대로 쓰도록 내어 주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겐 어디나 다 감옥이지요” 하고 그는 조용히 웃으면서 말하곤 했다. 우리는 서서히그의 아파트에 대향의 글리세린과 젤라틴, 인쇄 용지를 옮겨 놓았다. 작업은 밤에 이루어졌다. 방은 머리가 닿을까 말까 할 정도로 천장이 낮은데다가 꾀죄죄하고 초라해 마치 빈민굴과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의 쇠난로 위에서 혁명의 수프를 조리하고 그것을 양철판 위에 부었다. 맹인은 어슴푸레한 방에서 누구보다 정확하게 움직이며 우리의 작업을 도와 주었다. 내가 젤라틴판에서 갓 인쇄된 전단을 집어들면 젊은 남녀 노동자 두 명이 경건한 태도로 그것을 지켜 보고 나서 서로 눈빛을 교환하곤 했다.

만약 누군가가 ‘냉정한’ 눈으로 이 모든 것을, 즉 어스레한 곳에서 초라한 젤라틴판을 중심으로 이리저리 종종 걸음을 치고 있는 이 젊은 그룹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그들이 이런 방법으로 몇 세기나 계속된 강대한 국가를 타도할 수 있다고 상상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딱한 환상으로 보였을까! 그렇지만 이 딱한 환상이 한 세대가 지나가기도 전에 실현되었다. 이날 밤에서 1905년까지는 겨우 8년밖에 남지 않았고, 1917년까지 헤아려도 20년이 채 남지 않았다.

그 당시 구두(口頭)에 의한 프로파간다는 결코 인쇄물에 의한 프로파간다만큼 만족감을 내게 주지 못했다. 내 지식은 아직 불충분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우리는 참된 의미에서 진짜 연설은 아직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메이데이 때 딱 한 번 숲속에서 연설을 해야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횡설수설하고 말았다.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끔찍한 거짓말처럼 생각되었다. 그 반면에 서클에서 말할 때에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혁명 활동은 줄곧 전속력으로 앞을 향해 달려 가고 있었다. 나는 오데사와 연락을 취하고 그것을 유지 발전시켜 나아갔다. 저녁 무렵에 나는 니콜라예프의 부두로 나가 1루블을 주고 삼등석 표를 산 뒤 기선 갑판의 굴뚝 근처에 진을 치고는 윗옷을 머리 밑에 깔고 오버코트를 뒤집어 쓰고 잠을 자곤 했다. 그리고 아침에오데사에서 눈을 뜨면 그곳의 아는 사람을 찾아냈다. 그러고는 쓸데없이 여행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다음날 밤 기선 위에서 밤을 보내며 니콜라예프로 돌아왔다.

내가 오데사에서 접촉하는 사람의 숫자가 갑자기 증가했다. 나는 공공 도서관 입구에서 안경을 쓴 노동자와 만났다. 우리는 서로 상대방을 주의해서 바라보고 상대방의 신원을 간파했다. 그는 알베르트 폴리아크라는 식자공으로 훗날 당 중앙 인쇄소의 조직자로서 명성을 펼쳤다. 그를 알게 됨으로써 우리의 조직 생활에 신기원이 이루어졌다. 그와 만난 지 며칠도 되지 않아, 나는 국외에서 출판된 ‘불법’ 문헌으로 꽉찬 트렁크를 갖고 니콜라예프로 돌아왔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다 밝은 색 표지가 붙은, 새로운 선동 팜플렛이었다. 우리는 트렁크를 그냥 열어 둔 채 넋을 잃은 듯이 보물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이 팜플렛들은 즉시 손에서 손으로 넘어가 널리 배포되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우리의 권위를 두드러지게 높여 주었다.

나는 이 폴리아크와 대화를 나누다가, 최근에 전문 기사라고 떠들어 대며 우리 그룹에 끼어 들려고 애쓰고 있는 슈렌첼이라는 기계공이 실은 오래된 밀고자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 슈렌첼은 우둔하면서도 끈질긴 남자로 언제나 배지가 달린 제모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를 신용하지 않았지만, 그는 두세 명의 우리 멤버에 대해뭔가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를 무힌의 아파트로 꾀어 냈다. 그 자리에서 이름을 생략한 채 그의 전력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자, 그는 깜짝 놀라서 어쩔 줄 모르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무힌과 나는 그에게 만약 배신을 하면 가차없이 해치우겠다고 위협했다. 아무래도 이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그가 그 후 3개월 동안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체포되었을 때, 슈렌첼은 보복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우리에게 불리한 온갖 공포스런 증거를 다 늘어놓았다.

우리는 다른 도시의 노동자들도 포함시키려는 의도에서 조직 이름을 ‘남부 러시아 노동자 동맹’으로 정했다. 나는 동맹의 규약을 사회 민주주의의 정신에 준해 기초했다. 각 공장의 관리자들은 자신들의 대변인을 통해 우리의 영향력을 상쇄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날 성명을 내어 그에 대응하곤 했다. 이 말싸움은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도시의 수많은 주민들도 흥분시켰다. 종당에는 도시 전체가 각 공장을 전단으로 범람시키는 혁명가들 이야기로 법석대게 되었다. 우리의 이름이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경찰은 ‘저 정원에 모이는 애송이들’이 이런 엄청난 운동을 조직할 수 있다고 믿지 않고, 우리 배후에 좀더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들―아마도 나이든 유형수 출신들―이 있으리라 의심했기 때문에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 덕분에 우리는 일할 수 있는 기간을 2~3개월 더 얻었다. 하지만 마침내 경찰이 그룹을 연달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운동을 면밀히 관찰하게 되었다. …

(중략)

1898년 1월 28일, 대규모적인 검거 선풍이 일었다. 모두 합해 2백 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비밀 경찰이 채찍을 사용했다. 체포된 사람중에 소콜로프라는 병사가 있었는데, 그가 취조를 받다가 협박에 못이겨 구치소 이층에서 뛰어내렸지만 다행히 심한 타박상으로만 끝났다. 또 한 사람의 피구치자인 레반도프스키는 헌병에 의해 마침내 정신 착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체포된 사람들 중에는 그냥 우연히 운동에 관여하게 된 사람이 많았다. 신뢰하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버린 사람도 소수 있고, 심지어 몇몇 사람의 경우에는 우리를 배신하기까지 했다. 그 반면에 우리의 멤버 가운데서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지만 아주 강한 의지를 보여 준 사람들도 있었다. 예컨대 50세 가량의 독일인 선반공 아우구스트 도른은 기껏해야 두세 번밖에 서클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는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체포되어 장기간 구금되었다. 그는 훌륭하게 행동하고, 줄곧 구치소 안에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목소리로 즐거운―언제나 딱딱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독일 노래를 부르거나 엉터리 러시아어로 농담을 하며 체포된 청년들의 사기를 고무시켜 주었다. 모스크바 중계 감옥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감방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이때 도른이 사모바르를 향해 조롱하듯이 말하며 이쪽으로 와 달라고 부탁하고, 결국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대사로 끝을 맺곤 했다.

“싫어? 그래, 그렇다면 도른이 그쪽으로 가지!”

이런 장면이 날마다 되풀이되었지만, 모든 사람이 언제나 너그럽게 재미있는 듯이 웃어 주었다.

니콜라예프의 조직은 큰 타격을 입긴 했지만 괴멸당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곧 우리를 대신해 구멍을 메웠다. 그리고 혁명가들이나 비밀 경찰 모두 더 많은 경험을 축적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