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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하고 싶은 글

어떤 영주가 교회에서 나오는 한 여인을 향해 그의 개를 내몰았다 - 도로테 죌레

나는 사회의 부속품 역할을 하는 개인이, 개인적으로는 최선을 다해 맡은 일을 하더라도 그게 사회적으로는 그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멋들어지게 표현하고 싶었다.

예컨대, 아래 글에도 나오지만, 아이들을 사랑하는 선생님이 자기 반 아이들 공부를 열심히 시킨 결과 학생들의 전국적 경쟁 압력은 상승해 청소년 자살률이 높아진다.

그런데 이미 그런 내용을 포함하여 체제의 문제를 지적한 글이 있었다. 그래서 인용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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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주가 교회에서 나오는 한 여인을 향해
그의 개를 내몰았다.
그는 다만 장난삼아 그렇게 한 것이었다.
개는 여자를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그녀의 옷을 갈기갈기 찢었으며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다.

여인은 그 봉건적인 개 주인울 고발하기 위해 법정으로 갔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증인을 찾지 못했다.
영주는 그녀가 개를 부추겼으므로
그녀가 소송에서 지는 것이며,
소송비를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여인의 유죄를 선고한 판사는
자신도 이 사건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것,
하지만 자기는 판사로서 공평무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개인적인 의견을 밝힌다.
"다른 일에 상관하려 하지 말고 집에 들어앉아 있으라"고
그의 어머니는 말한다.

가정 안에서 유효했던 것이, 교리문답 책에서 가르치는 것이
그 영역을 벗어나면 아무 효력이 없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나 공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봉건적 소송에 있어서의
기괴한 일들 중 몇 가지가 분명 없어졌다.
그러나 내적, 외적 도덕 사이의 모순, 그리고
친밀한 영역과 사회 영역 사이의 모순은 오히려
계속해서 깊어졌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놓여있는 상황이
객관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집에서는 착한 어머니인 전자산업체에서 근무하는 여공은
그녀가 매일 8시간씩 일하여 만들어내는 작은 부속품들이
무기산업체에 보내져 다른 작은 아이들을 살해하는 목적에
쓰이는 무기가 생산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집에서 아이를 안고 즐겁게 해주는 여교사가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점수를 계산하고
그 아이들에게 당국에 의해 지시된 강압을 전달해 준다.
교실 안의 학생들 수와 교과 과정의 압력은
그녀로 하여금 내가 사랑의 관심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을
객관적으로 못하게 한다.

현대 철학은 국가, 경제, 학문, 가정과 같은 다양한 조직을
구분짓고, 마지막 조직인 가정에 사랑을 첨가시킨다.
관심은 파괴되고 고통은 감상화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랑은
1) 가정이라는 조직 안에서, 2) 크리스마스 때에 발견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점점더 축소되는 느린 과정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무도 사랑의 진실,
사랑의 현재성과 힘을 올바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이용의 목적, 쾌락의 목적만을 알며
인간의 활동을 생산과 소비에 제한하고
주는 것과 받는 것에서 벗어나
팔고 사는 행위가 되어버린 세계에서
사랑의 관심이 생길 수도 없고 자랄 수는 더욱 없다.

개인 관계가 되어버린 사랑의 실패를 보고 우리는
우리의 사랑에 대한 욕구가 잘못되었다고 추론해야 할까?
그렇지 않으면 가정에 정주하지 않고
정의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우리가 부르주아 시대의 종말에서 보게 될 사랑과는
완전히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가졌다고 추론해도 좋을 것인가?

가장 절실한 욕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세상을 벗어나서 흥정하려고 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인가?
아니면 주고받는 것을 다른 경제적 토대 위에서
모든 인간에게 실현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과거 시대에 있어서보다 이 욕구들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회를 생각할 수 있으며,
또 이미 그런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은 아닐까?

- 도로테 죌레(1970년대 정치적 여류신학자) <환상과 복종>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