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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된 예언자 - 트로츠키》, 스탈린 최초의 당 간부 공개처형 - 블룸킨 사건

아이작 도이처가 쓴 트로츠키 3부작 중 3권을 읽고 있다. 혁명가의 진가는 암울한 반동의 시기에 드러난다고 누가 그랬다는데, 이 책을 읽으면 정말 그렇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새까만 밤처럼 자신의 명민함을 잃어버린 시기에 트로츠킴만이 홀로 빛났다. 이 시기 트로츠키의 삶을 보면 혁명가라는 게 얼마나 힘든 '직종'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그의 모습조차 본받고 싶어진다면 진정 혁명가가 될 자세가 갖추어진 것 아닐까 한다.

어쨌든,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발견해서 메모삼아 기록해 둔다.

스탈린과 볼셰비즘 사이에 피의 강물이 흐른다는 말을 들어본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건 사상적으로 그렇다는 말일뿐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그렇다는 말이다. 스탈린은 소련에서 자신의 지배권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 1917년 10월 혁명의 유산을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일소했다.

스탈린은 히틀러와 달리 볼셰비키 당의 지도자들 중 하나였다. 히틀러의 충복들은 깡패들이었지만, 스탈린의 충복들은 혁명가들이었다. 그래서 스탈린의 권력 장악은 매우 조심스럽게 조금씩 진척됐다. 그리고, 결정적 순간이 왔을 때 스탈린은, 자신의 충복이었던(혹은 러시아 국가의 충복이었던) 혁명가들조차 살해한다.

블룸킨 사건

블룸킨은 사회혁명당 출신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혁명 직전에 청소년이었는데도 사회혁명당의 테러리스트 조직에 가담했다고 한다. "시인의 기질도 갖고 있던 그는 낭만적 이상주의자였고, 자기 나름의  대의에 조숙하고 단순우직하면서도 무제한적으로 헌신했다"(131쪽)

혁명 러시아는 1차 세계대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독일 제국과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벌인다. 이로 인해 꽤 넓은 땅을 빼앗겼다.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으로 검색해 보기 바란다.

사회혁명당은 여기 반대했다. '볼셰비키가 강화협상을 타결하는 과정에서 혁명을 배반했다'고 사회혁명당원들은 굳게 믿었다고 한다.(132쪽) 그래서 독일과 혁명 러시아의 전쟁을 부추기기 위해 주 러시아 독일 대사를 암살한다. 이게 '미르바흐 백작 암살 사건'이다. 그리고 블룸킨은 미르바흐 백작을 암살한 두 명 중 하나였다. 이들은 붙잡혔다.

트로츠키는 두 사람을 직접 만나 정치적으로 설득했다. 그리고 블룸킨은 뉘우쳤다. 그 후 블룸킨은 혁명의 대의에 헌신했다.

트로츠키와 라데크 둘 다 반대파가 됐을 때도 블룸킴은 자기가 두 사람에  대해 연대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맡고 있던 업무의 성격상 그는 반대파의 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자기의 입장을 게페우[각주:1]의 수장인 멘진스키에게 분명히 밝히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133쪽)

그리고 블룸킨은 트로츠키가 러시아에서 추방된 후인, 1929년에 해외에 나갔다 들어오는 길에 트로츠키가 추방돼 있던 알마아타에 가서 그를 만난다.

그리고 블룸킨은 러시아로 돌아오자마자 체포됐고, 반역죄로 처형됐다.

이 사건이 놀라운 이유는, 주요한 당 간부가 트로츠키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사형당했다는 데 있다.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의 일반적인 원칙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각주:2]

블룸킴의 처형은 그와 같은 종류의 처형으로는 최초의 것이었다. 사실 그 이전에도 굶주리고 탈진한 상태에서도 신념을 지키다 죽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있었다. ... 그 때까지만 해도 볼셰비키는 자코뱅당[각주:3]이 저질렀던 치명적 오류를 되풀이해서는 절대로 안 되며 목숨을 건 싸움 속에서도 사형이라는 수단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존중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규칙은 무너졌다. 블룸킨의 처형은 당 내부의 규율위반 행위에 대해 사형이 부과되고 집행된 최초의 사례였다. 게다가 그의 규율위반 행위라는 것은 그저 트로츠키와 만났다는 것뿐이었다.(138쪽)

그리고 책을 읽다 보면 수많은 과정을 거쳐 이런 일이 나중에는 얼마나 극으로 치닫게 되는지 알 수 있다. 첫 번째 사건과 가장 극으로 치달은 사건을 함께 배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일 것 같다.

[소련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수감돼 있던 수용소 - 허대수] 1938년 3월 말경의 어느 날 아침, 대부분 주도자급 트로츠키주의자인 25명이 불려나갔다. ... 15분이나 20분쯤 지났을 때 숙소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일제사격이 실시됐다. ... 다음날은 40명 이상이 같은 방식으로 불려나갔다. ... 모든 사람이 계속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한 시간가량이 지났을 때 갑자기 천지를 뒤흔드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 매일 또는 하루 걸러 30명 내지 40명씩 불려나갔다. ... 한 번은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 트로츠키주의자인 1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불려나갔다. (...)[이 말줄임표는 원문 - 허대수] 그들은 행군을 시작하면서 <인터내셔널>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숙소에 있던 사람들도 일제히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 이런 식의 학살이 페초라 지역의 모든 수용소에서 5월까지 계속 이어졌다. ... 100명이 조금 넘는 수의 사람들만이 살아남았다.(596-597쪽)

이런 사람들 안에는 과거 스탈린을 지지했던 사람들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자신에게 동조했던, 스탈린의 정치적 입장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그를 지지했던 혁명가들조차 죽음으로 내몰았다. 무엇보다 스탈린의 아내 자신이 죄책감에 못이겨 자살을 선택했다.

이것이 스탈린주의와 볼셰비즘 사이 피의 강물이다.

도대체 누가 스탈린의 소련을 혁명의 결과물이라고 하는가. 스탈린의 소련은 혁명을 파괴한 결과물일 뿐이다.

  1. 소련 안기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혁명 러시아 초기에는 활동이 매우 제한적이었고, 주로 반혁명 활동에 대한 대응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점점 체제 내부의 반대파를 단속하는 용도로 변해갔다고 한다. - 허대수 [본문으로]
  2. 물론 부르주아 국가는 이런 원칙을 쉽게 내던지곤 한다. [본문으로]
  3. 프랑스 혁명의 좌파. 우파는 지롱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