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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공산주의는 개인 소유 자체를 부정하는가

내가 사회주의/공산주의라고 쓴 이유는 두 말이 의미하는 바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현실에서 두 용어가 구분돼 사용된 것은 역사적 기원이 있다.

원래 사회주의 정당을 의미하는 용어는 사회민주주의였다. 레닌의 저작을 보면 ‘사회민주주의자’라는 말이 볼셰비키를 가리키는 말로 자주 나온다. 우리가 온건한 정당으로 기억하는 독일 사회민주당도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혁명정당으로 여겼다. 레닌은 사회민주당에서 우파적 위치를 차지했던 카우츠키에게 여러 차례 존경을 표하며, 그의 저작을 인용했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기존에 지배적 위치를 차지했던 이 사회민주당들이 전쟁에 찬성했다. 독일 사민당은 독일이 전쟁 공채를 발행하는 데 찬성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 정당, 노동자 국제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쏠 총알을 더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데 찬성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해, 새로운 질서를 창출한 후 레닌은 사회민주주의라는 말이 더이상 혁명과 동일시되기 힘들다고 느꼈다. 그래서 레닌은 혁명적 사회주의를 진지하게 추진하는 세력을 ‘공산당’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이에 화답해 기존 사회민주당과 분열해 혁명을 진지하게 추구한 세력들은 자신들을 ‘공산당’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독일에는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경쟁했다. (물론 독일 공산당은 본받을만한 조직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공산주의가 북한과 동일시되고, 사회주의는 서구 사민주의와 동일시된다. 둘다 틀렸다. 물론, 언어가 사회적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중요하지만 이런 경우는 ‘오염된’ 경우므로 엄밀하게 논의할 때는 본래 의미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용어를 동시에 배치해 오해를 바로잡고자 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조선일보 강천석은 2008년 12월 말에 다음과 같이 썼다.

초라하게 세상을 떠났던 마르크스의 계시를 받았다는 무리들이 떼지어 서울 거리를 휩쓸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2009년은 '경제의 해'이자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정치의 해'가 될 것이다.

(나는 혐오하는 신문에 링크를 주지 않는다. 찾아 보고 싶은 분들은 찾아서 보기 바란다.)

마르크스주의가 20세기 초처럼 사회 개조 프로젝트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지만, 경제 위기가 가속화하면서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는 건 분명해 보인다. 우익 논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경계하는 빈도도 늘어나는 것 같다.

얼마 전 중앙일보에는 이런 기고가 실렸다.

30세 이하 미국인 중 37%가 자본주의를 선호한다고 답했지만 사회주의가 좋다고 응답한 사람도 33%나 됐다 … 지난 일 년 동안 세계를 혼란에 빠뜨려 놓고도 자신을 구제해 달라고 납세자에게 손을 벌리고 있는 월가의 혼란상이 자본주의의 정당성을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해럴드 마이어슨(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 누가 사회주의를 퍼뜨리고 있나, 중앙일보 2009.4.28

(역시 혐오하는 신문에 링크를 주지 않는다.)

경제 위기가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그래서 나는 혹시나 관심 가진 사람들이 검색할까 싶어 사회주의가 개인 소유를 무조건 엄금하는 사상인지 써 보려고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아니다.

사회주의 혁명이 나면 내 MP3를 뺏아가는 거야?

위 소제목의 질문에 대해서도 답하자면, 아니다.

사회주의가 주장하는 ‘사적소유의 철폐’는, 엄밀히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사회적 부를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굳이 거칠게 번역해 말하자면, ‘부를 근본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다시 엄밀히 말하자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한다는 얘기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썼다.

너희는 우리가 사적 소유를 청산하려 한다고 경악한다. 그러나 너희의 기존 사회에서 사적 소유는 구성원의 10분의 9에게는 이미 폐지되었다.[이미 구성원의 10분의 9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의미] 사적 소유가 10분의 9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사적 소유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너희는 사회의 압도적 다수의 무소유를 필수 조건으로 전제하는 소유를 우리가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사회적 생산물을 취득할 권력을 빼앗지 않는다.[생산물을 개인이 소유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 다만 그것은 이 취득을 통해 타인의 노동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려는 권력을 빼앗는 것이다.

이진우 번역, 《공산당 선언》, 책세상, 2002, pp36-37

한마디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째째하게 개인이 소유한 자전거, MP3 따위를 빼앗아 가는 게 아니라는 거다. 1년에 건물을 몇 채씩이나 짓지만, 정작 자기 집은 없는 건설 노동자, 하루에 자동차를 수십 대나 만들지만 정작 자기 차는 없는 노동자, 하루에 16시간씩 일하지만 손에 쥐는 돈을 100만 원도 채 안 되는 그런 노동자들이 생겨나는 원인으로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지목하는 것이다.

이런 생산 수단을 이건희의 손에, 정몽준의 손에 맡겨 놓는 것이 아니라, 전국의 노동자들이 민주적으로 뽑은 대표자들의 대의체계에 의존해서 통제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에 관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단체인 ‘다함께’는 이를 ‘민주적 계획 경제’라고 부른다. 나는 이 명칭이 오해를 피할 수 있는 훌륭한 명칭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적 민주주의

우리가 흔히 ‘자유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체제는 정치 대표의 민주적 선출권을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이들은 별반 권력이 없다.

이명박의 사례는 반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명박은 경제권을 장악한 사장들의 대표다. 이명박은 사장들의 이해를 충실히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는 심복이다. 사장들이 권력을 몰아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노무현 정도를 보면 어렴풋이 윤곽이 보이지만, 노무현도 그닥 훌륭한 예시는 못 된다. 어쨌든, 노무현의 사소한 개혁이 번번히 좌초한 것은 이 사회의 권력을 쥔 사장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노무현이 훌륭한 예가 못 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노무현이 사장들의 압력에 저항하다가 실패한 게 아니라, 사장들의 압력을 아주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그리고 박연차 사건에서 드러나듯, 노무현을 둘러싼 세력은 사장들과 영합했다. 노무현 자신은 어땠을지 몰라도 말이다.)

서구 사민주의 정당들의 집권 사례를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프랑스 사회당과 영국 노동당의 좌파적 정권이 집권해서 사회 개혁을 추진하려 할 때 사장들은 자본을 해외로 유출시키고 경제를 마비시키며 저항했다. 그 결과 이 사민주의 정당들은 사장들의 압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경제적 민주주의 없이 진정한 민주주의 없다. 이것이 사회주의 사상의 핵심 중 하나다.

당장 실현할 경제적 민주주의

당장 모든 경제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제안한다. 그 경제적 민주주의를 부분적으로나마 진전시킬 수 있는 대안들은 널려 있다.

당장 종부세를 현실적으로 부활시키는 것도 경제적 민주주의의 한 예다. 사회주의에는 못 미치지지만 말이다. 또한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는 부유세도 경제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수 있는 좋은 예다. 무상의료와 무상교육도 말할나위 없이 좋은 예다.

쥐꼬리만큼 있는 경제적 민주주의조차 후퇴시키려는 시도에도 맞서야 한다. 최근의 좋은 예는 고대병원 노조가 투쟁하는 것처럼 병원의 영리법인화에 반대하는 것이다. 임금삭감에 반대하는 것도 좋은 예다. 사장들의 천문학적 연봉은 놔두고 노동자들 월급만 깎은 것은 경제의 민주성을 심각히 해치는 행위다.(물론, 임금노동 자체가 경제적 민주주의에 위반하는 것이긴 하지만 임금 삭감이 경제 영역에서의 민주성을 해친다는 것은 명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