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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집단지성, 촛불에만 있었나

이건 ‘논평’란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로 분류했다. 지금 사회 분위기를 보고 논평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동안 생각해 온 것을 정리하는 입장에서 쓴 글이니 좀 래디컬한 면이 있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2008년, 촛불과 함께 〈한겨레〉류의 언론들은 새로운 인터넷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찬양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집단 지성’이라는 게 예전에는 없었던 것처럼 회자됐다. 해학과 풍자는 ‘새로운’ 저항의 방식이라고 얘기됐다. 한국 민중의 독보적인 업적이라고까지 얘기됐다.

이렇게 말하는 게 촛불 운동에 기여한 〈한겨레〉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그래도 객관적으로 아는 것은 중요하기에 요즘 사회분위기랑은 약간 안 맞는 글을 쓰고자 한다.

좀 솔직히 말하자면, 첫 문단에서 나열한 저런 반응들은 촛불에 대한 ‘지나친 호들갑’이다. 그렇다고 내가 촛불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촛불이 역사적으로 있었던 다른 위대한 운동들과 다르지 않다고 얘기하는 것이며, 그건 촛불 운동에 대한 폄하가 전혀 아니다. 촛불은 87년 6월 항쟁에 비견됐는데, 나도 똑같이 생각한다. 그만큼 위대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얘기하려는 것은 ‘전혀 새롭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오늘은 ‘인터넷 민주주의’와 ‘집단지성’이 전혀 새롭지 않다는 점을 말하려 한다.

‘입소문 마케팅’과 촛불 운동, 그리고 역사상 수많은 운동

최근 기업들은 ‘입소문 마케팅’(버즈 마케팅, 바이럴 마케팅)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기업 광고보다 주변 사람들을 신뢰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에델만의 보고서에선가 본 것인데, 주변 사람들만큼 신뢰받는 것은 전문가 집단이 유일했다. 기업 광고는 거의 신뢰받지 못했다.(너무 당연하잖아!)

이것은 어쨌거나 사람들이 ‘이데올로기 주입’만큼이나 현실의 경험에 영향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집단적 경험을 통한 신뢰하는 사람들끼리의 그물망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는 한 사회의 지배적 사상은 지배자들의 사상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전자, 이데올로기 주입을 의미한다. 학교 교육, 조중동 찌라시의 내용, 그리고 이에 영향받은 사람들, 직장에서 허구헌날 듣는 소리, 방송에서 여과없이 전달하는 ‘교양 있는’ 지배자분들의 헛소리 등등이 이를 구성한다. 아, 광고도 추가.

한편, 마르크스주의는 사람이 경험을 통해 변한다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한 말인지 레닌이 한 말인지 헷갈리는데 여튼 둘 중 하나는 이렇게 말했다. “파업은 노동자들의 학교다.” 괜찮은 파업은, 노동자들을 지배하던 직장의 온갖 굴레에서 벗어나 노동자들의 민주적 힘을 훌륭히 발휘하게 해 준다. 대체로 파업의 쟁점은 민주적 권리를 요구한다.(경제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므로 경제권 문제도 ‘민주적 권리’ 안에 포함시켜 말했다.)

지배적 사상이 지배자들의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의 힘으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지배자들 사상이 노동자들을 지배하는데 스스로 해방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지?) 바로 사람들이 경험에서 배우기 때문이다.

경험은 다양하다. 자신이 실제로 한 경험일 수도 있고, 가까운 사람의 경험일 수도 있고, 신뢰하는 사람의 입을 통한 경험일 수도 있다.

1980년 광주가 주류언론에서 하나도 얘기되지 않았는데 결국 역사 속에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경험’ 덕택이다. 지배자들의 사상은 민중의 경험과 집단지성을 이겨내지 못했다.

이제 내가 하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은 훌륭한 수단이다. 집단지성을 작동하게 하는 훌륭한 수단이다. 그리고 그 수단은 역사적으로 변해 왔다.

덧붙이자면 인터넷은 오늘날에도 압도적이고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 촛불집회에 나온 청소년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PD수첩〉이었다. 인터넷은 물론 많은 정보를 제공했고, 압도적 비율로 정보를 제공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만’ 정보를 얻었을까? 한미FTA에 반대하며 광우병 쇠고기에 대해 오랜 폭로를 수행해 온 ‘운동권’들의 노력 없이, 신뢰받는 지식인 집단의 무게있는 발언 없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없이 촛불이 그렇게 활활 타오를 수 있었을까?

트로츠키는 그의 위대한 저작 《러시아 혁명사》에서 ‘집단지성’이라고 불릴 만한 것을 묘사한 바 있는데, 지금 그 책이 우리 집에 없어서 인용할 수가 없다. 기억에 의존해 불확실하게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머시기 머시기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남아있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 뭐가 진실인지 알 수 없다고 하는 작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럴 때는 흔히 민중들이 기억하고 있는 바가 진실에 가장 가깝다. 이들은 부분부분에서 한 경험을 모으고 모아서 종합적인 진실을 만들어 낸다.

왠지 오늘날의 집단지성을 찬양한 어떤 말과 흡사하게 보이지 않는가.

프랑스 혁명 때부터 온갖 위대한 혁명, 봉기, 투쟁 때는 항상 이런 입소문(인터넷을 통하든, 벽보를 통하든, 편지를 통하든, 말 그대로 입소문을 통하든간에 여하튼간에 주변 사람들과 어디선가 주워들은 얘기와 자신의 경험을 종합하는 그런 것!)과 집단지성이 작동했다.

촛불은 그것을 훌륭히 해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온갖 종류의 회의주의 ─ 지금은 운동이 가능하지 않다거나 이명박은 건재하다거나 하는 소리들은 모두 지나친 비관주의이자 몰역사적인 인식이다. 저항은 가능하고, 이명박(을 포함한 한국의 쓰레기집단)은 제거 가능하다.

(참, 써놓고 보니 해학과 풍자를 말머리에서만 언급하고 얘기하지 않았는데, 이건 조선시대 사설시조나 탈춤에도 나오는 민중의 아주 전통적인 저항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