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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신영철에 대한 반발이 진보/보수와 무관한가

판사들이 신영철 대법관의 부당한 재판 개입을 폭로하는 모습을 보면 이 사회가 많이 민주화됐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이명박이란 하나의 권력이 모든 사람들의 정신마저 한꺼번에, 한 번에 억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것 같아 마음에 좋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재밌는 것은 〈조선일보〉가 적극적으로 이 사건을 진보/보수의 대립으로 보는 반면, 〈한겨레〉는 이것이 진보/보수와 무관한 일이라고 변호하는 모습이다.

〈조선일보〉는 7일치 사설에서 … “자기 성향이 맞지 않는다고 법원 내부 일을 외부에 조직적으로 폭로하거나 일부 언론과 편을 짜 법원 내부 인사에 대해 인민재판식으로 집단 몰매를 가하는 것은 … 파괴공작과 다를 바가 없다”고 썼다.

법관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낸 사건을 진보-보수 대립의 산물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문제의 핵심과 어긋난다.

[사설] 부당한 재판 간섭에 색깔론이 왜 나오나, 〈한겨레〉, 2009.3.8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조선일보〉가 더 현명하다고 본다.

또 그들의 논리와 근거는 왜곡으로 가득차있지만, 적어도 그들의 위기감과 정서는 진실에 가깝다.

진보/좌파가 뭔가?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좌파라는 말에 덧씌운 마녀사냥의 느낌을 지우기 위해 더 부각된 이름이 진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좌파든 진보든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물론 엄밀한 용법으로 들어가면 차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진보/좌파라는 말은 무엇인가? 그냥 자신들의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애쓰는 기성 정치세력과 큰 차이가 없는 세력인가? 아니다.

진보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측면은 대중 정치다. 《파시즘》이란 책을 보면 19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보수적 정치인들은 대중의 투표권 획득 앞에서 대처하는 방법을 찾지 못해 쩔쩔맸으며, 대중 정치의 1차 수혜자는 좌파였음이 나와 있다. (물론 2차적인, 그리고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파시즘이었다.)

보수/우파정치와 달리 진보/좌파정치는 바로 대중들의 운동에 기초한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정치다. 그리고 이를 위한 모든 활동을 포괄한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다소간이나마 정치적 자유의 공간이 열린 한국 사회에 진보/좌파 세력이 자라난 것은 당연하다. 단, 이명박과 〈조선일보〉가 줄곧 외쳐대는 것과 달리, 음모에 의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사람들의 자연스런 열망에 의해 그렇게 됐다.

민주적인 행정을 바라는 것, 가난한 사람이 조금이나마 더 인간적인 삶을 누리기 바라는 것,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 이 모두를 위한 집단적이고 민주적인 활동이 바로 좌파정치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부당 개입에 항의하는 판사들의 행동은 ‘좌파적’이라고 해도 무리 없다. 다만, 〈조선일보〉식의 음모론을 반박하면 될 일이다.

좌파에 덧씌워진 굴레을 벗기기 위해서는

좌파는 더 당당해야 한다. (물론 누에님이 줄곧 비판하는 것처럼 〈한겨레〉는 좌파언론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세계적 이데올로기 지형에서 본다면 〈한겨레〉는 누에님의 비판처럼 중도우파 민족주의 언론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한겨레〉는 중도좌파 언론이다.) 온갖 민주적 권리(경제적 권리를 포함해서)들이 바로 좌파들이 원하는 바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좌/우는 (생각의 대립이라는 잘못된 용법으로 쓰이는 의미에서) 이데올로기 대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현실 세계에서 권력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를 둘러싼 대립이다. 한 쪽은 극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다른 한 쪽은 다수가 권력을 민주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