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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권력의 시녀 경찰, 검찰

△ 10월 9일 경찰은 용역깡패 폭력에 항의하는 성동구 철거예정지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끌어냈다(이종우, 서민들을 집에서 내쫓고 있는 뉴타운 건설, <저항의 촛불>, 2008.11.3)

검경이 권력의 시녀라는 것은 예전에도 언급했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해 쓰기로 했다. 지금 철거민 5명 사망을 두고 이명박과 그 시녀 검경의 짓거리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경찰

오늘자 <한겨레>를 보면 이런 정황이 종합적으로 드러난다. 우선 경찰 관련 대목을 보자.

경찰은 용역업체 동원 정황을 보여주는 내부 무전 기록이 공개되자 “경찰 기록이 아니다”라고 부인하다 뒤늦게 “경찰을 용역 직원으로 착각한 현장 간부들의 오인 보고”라며 말을 바꿨다. 그러나 27일 전체 무전 기록을 보면, 경찰이 용역 직원들과 사실상 합동작전을 펼쳤음을 보여주는 또다른 교신 내용들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추가로 드러난 무전 기록을 보면, “(농성) 건물 2단에 철거반들이 있는데 왜 시정(장애물 해체)이 안 되죠”, “가급적 철거반원들을 앞세워 장애물 제거 조처를 하고, 안 되면 경찰력이라도 신속히 제거” 등의 교신을 한 것으로 돼 있다. 이처럼 단순한 ‘오인 보고’로 볼 수 없는 정황들이 잇따라 드러나고 있지만, 경찰은 “교신 내용은 (지휘관들이) 밖에서 본 것이므로 현장 상황과 맞지 않을 수 있다”고 강변하고 있다.

신승근 최현준 김남일 기자, 용산참사 처리 ‘거꾸로 정부’, <한겨레>, 2009.1.28

자본주의 국가에서 경찰은 태동부터 민중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용도였다.

자본주의가 맨 먼저 발전했던 영국에서 최초의 노동자 계급 대중 운동이었던 차티스트 운동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경찰이라는 무장 집단이 없었다. 그 전까지는 지배자들은 군대를 이용해 치안을 유지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대중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는 일은 엄청난 분노와 저항에 직면했다. 그래서 살인 장비로 무장하지는 않았지만 군대식으로 편제한 억압 기구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 때부터 경찰은 자본주의 체제의 일반적인 제도로 자리잡았다.

정진희, 마르크스주의 기초배우기 ─ 경찰은 왜 그토록 폭력적일까?, 월간 <다함께>, 2001.4.28

프랑스 혁명을 다룬 대중개설서 《혁명만세》에도 비슷한 언급이 나온다. 1787년 최초의 폭동이 일어났을 때를 다루면서 나온 언급이다.

어찌 됐든 경찰은 이런 대규모의 소요 사태를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불을 끄거나 면허증 발급 같은 일에 하루를 보내던 사람들이었다. 경찰은 몇몇 세금 징수나 거리 청소를 담당했으며, 유모들을 전담하는 특별부서도 갖고 있었다. 경찰이 유모들을 관리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거 그림 진짜 안 좋다. “옳지, 꼬맹이, 이제 젖 빨아! 자꾸 말 안 들으면 아저씨가 좀 심한 방법을 쓸지도 몰라!”

마크 스틸, 《혁명만세》, 바람구두, 2008, 67p

혁명 직전의 파리에도 오늘날처럼 무장력을 위주로 하는 경찰은 없었던 것이다. 경찰이 무장하게 되는 것은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통계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보통들 경찰은 범죄를 예방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통계에 따르면, 경찰이 '민생치안'에 관련된 범죄를 해결하는 비율은 전체의 10분의 1도 안 된다.

정진희, 마르크스주의 기초배우기 ─ 경찰은 왜 그토록 폭력적일까?, 월간 <다함께>, 2001.4.28

검찰

검찰도 마찬가지다. 다시 오늘날로 돌아와 오늘자 <한겨레>의 언급을 보자.

검찰은 용산 철거민과 전국철거민연합회원 5명을 구속하는 등 철거민 쪽에 대해서는 신속하고 강도 높은 수사를 편 반면, 경찰의 과잉진압 논란과 관련해서는 자체적으로 밝혀낸 게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이다. … 검찰은 사건 발생 이틀 뒤인 지난 22일 화염병을 화재의 직접 원인으로 판단하고 구속자들 중 3명에게 특수공무방해 치사상 혐의를 적용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정밀감식 결과가 나오기 전이었다.

신승근 최현준 김남일 기자, 용산참사 처리 ‘거꾸로 정부’, <한겨레>, 2009.1.28

마르크스는 대안사회의 대략적 형태를 다룬 책 《프랑스 내전》(파리 꼬뮌을 다뤘다)에서 사법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검찰을 다룬 것은 아니라서 다소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근본 속성은 비슷하다고 본다.

그 가면은 법관들이 역대 모든 정부에 대해 충성의 맹세를 한 다음 다시 그것을 파기하곤 했던 자신들의 비굴한 복종을 은폐하는 데 기여했던 것입니다.

칼 맑스, 《프랑스 내전》, 박종철 출판사, 2003

마르크스는 권력의 시녀가 됐던 사법부를 통제하기 위해 파리 꼬뮌이 다음 조치를 취했다고 썼다.

사이비 독립성의 가면이 법관들로부터 벗겨졌습니다. … 나머지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치안판사와 법관도 선거로 선출되고, 책임을 져야 했으며, 소환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칼 맑스, 《프랑스 내전》, 박종철 출판사, 2003

대중 운동

검경, <한겨레>는 이들에게 중립성을 요구하지만, 자본주의는 진공이 아니다. 검경 중립성에 단호한 의지를 가진 이는 검경에서 축출당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로 가득찬 검경은 결코 중립적일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이 그나마 ‘중립’적으로 보일 때는 대중운동이 이들을 강력하게 압박할 때뿐이다. 그나마도 한 때의 위기를 넘기기 위한 눈가림일 뿐이다.

1995년 7월 18일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해 전두환ㆍ노태우 두 광주 학살자에게 면죄부를 줬을 때만 해도 불과 몇 달 뒤 이들이 철창 안에 갇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 9월 29일에는 전국 1백여 개 대학에서 동맹휴업이 벌어지고 서울에서만 2만 명이 시위를 벌이는 등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5천 명이 넘는 교수들이 연대 서명에 동참했고 한국노총이 조직한 비자금 규탄 집회에 7천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60만 명이 학살자 처벌을 요구하는 서명을 했다.

결국 운동의 압력에 밀려 … 전두환과 노태우는 법원에서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비록 2년 뒤 김영삼·김대중이 공모해 두 살인마를 풀어줬지만, 이 투쟁의 교훈은 여전히 의미 있다.

장호종, 두 살인마를 처벌한 대중투쟁의 힘, <맞불>, 2008.4.28

자본주의 국가에 ‘중립성’을 요구할 수 있다. 뭔들 요구를 못하겠는가. 하지만 이것이 가까스로나마 실현되려면 대중 운동이라는 거대한 압력이 있어야 한다. 더더군다나 독재로 자신의 나침반 바늘을 명확히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 하에서라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