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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이작 도이처, 《비무장의 예언자 트로츠키 : 1921-1929》

이 책은 꽤 불쾌한 책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고립된 소비에트 공화국이 어떻게 타락해 가는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의 걱정

아이작 도이처, 《비무장의 예언자 트로츠키 : 1921-1929》

아이작 도이처, 《비무장의 예언자 트로츠키 : 1921-1929》

레닌의 유언장은 이제 와서는 잘 알려진 것이지만, 이 유언장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 레닌은 스탈린을 폄하하고, 자리에서 끌어내릴 것을 주장했으며 트로츠키가 개중 가장 나은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어디선가, 레닌의 유언장을 무슨 유훈통치 같은 일이라며 비난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레닌의 유언장은 '유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언장의 공개여부까지 투표로 결정했다. 공개하지 않는 결정에 대해 트로츠키는 항의했지만 받아들였다. 다수결이라는 게임 규칙을 모두가 준수한 것이다.(나는 이 때의 다수결은 민주주의라고 보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내용으로 결정돼야 한다. 그런데 레닌의 유언 ㅡ 국가의 관료화 정점에 있는 스탈린에 대한 경고 ㅡ 은 볼셰비키 정치국이 가려서는 안 되는 진실이었다.)

첫 번째 실수

어쨌든, 레닌은 새로 건국된 소비에트 공화국이 관료적으로 왜곡된 노동자 국가라는 사실을 병상에서 알아차리고 아주 괴로워했다. 레닌은 그래서 트로츠키에게 동맹을 제안한다. 트로츠키는 동맹을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레닌의 감각을 다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레닌은 관료주의와 싸우려고 했고, 관료주의의 정점에는 스탈린이 있었다. 스탈린은 민족문제에서 소수민족을 탄압했다. 레닌은 그걸 바탕으로 대의원대회에서 스탈린을 끌어내리자고 제안했다. 증거는 충분했다.

트로츠키는 레닌의 제안대로 하지 않고 침묵했다. 스탈린은 괜찮은 지도자로 남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실수

트로츠키의 두 번째 실수는, 스탈린이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불화를 겪을 때 재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두 세력의 동맹은 깨지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1년 반 동안이나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분명 그는 중앙정치에 관심을 껐다. 협잡으로 느껴졌던 것이라고 아이작 도이처는 분석한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트로츠키는 당내 투쟁에서 멍청했다.

(생각이 좀 변했다. 이 글을 참고하라 : 아이작 도이처 트로츠키 3부작에서 트로츠키의 반스탈린 투쟁에 대한 왜곡 서술 , 2009년 12월 25일에 추가함)

올가미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트로츠키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공정하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자. 그들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창조자였다. 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에프, 부하린, 스탈린을 위시한 고참 볼셰비키 대다수는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창조물을 지켜내야 했다. 창조물을 지켜내는 현실적 방안은,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강철 규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1당 독재 체제) 모든 부르주아 국가가 소비에트 공화국을 노리는 시점에서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었을까. 경제 위기는 반란과 내분을 촉진했다. 정치적 자유는 어쩌면 소비에트 공화국을 산산조각냈을 것이다.

1당 독재는 전쟁 중 임시로 취해진 조치였다. 분파 결성 금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도, 상황은 복구될 줄을 몰랐다. 볼셰비키의 창의력이 고갈된 것이 아니라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다. 전쟁은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 전쟁 중 지켰던 규율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한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정치적 자유를 금한 바로 그 점(1당 독재 체제)이 지나치게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 바로 그 상황이 소비에트 공화국의 창조자들 자신의 목을 얽어맸다. 스스로 만든 올가미는 스스로의 목을 죄어들어갔던 것이다.

루시퍼 이펙트

최근에 내가 읽고 있는 《루시퍼 이펙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시스템은 상황을 포함한다. 하지만 시스템은 상황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더욱 널리 퍼지며 더욱 광범위한 사람들의 네트워크, 사람들의 기대와 기준, 정책, 그리고 법률에 영향을 미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스템은 역사적 토대를 획득하게 되고 때에 따라서 그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을 지배하고 지시하는 정치경제적 권력 구조를 갖추게 된다. 시스템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행동의 맥락을 창조해내는 상황을 가속화한다. 어떤 시점에 이르면 시스템은 그 시스템을 창조해낸 사람들, 심지어 그 시스템의 권력구조 안에서 명백하게 권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자율적으로 기능하는 독립적인 개체가 된다. 각 시스템은 그 자체의 문화를 개발해내고 수많은 시스템들이 집단적으로 한 사회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293p

밑줄은 내가 그은 것이다. 밑줄 그은 부분에 나오는 통찰은 새길 만하다. 《루시퍼 이펙트》는 평범한 사람들이 억압적 감옥에서 어떻게 변해가는지 관찰한 실험의 보고서다. 수감자와 교도관으로 나뉜 사람들은 전에 없던 모습을 드러내면서 변해 간다.(이 책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쓸 것이다.)

그리고 그 실험을 총괄했던 필자 자신 역시도 변했다. 그는 교도소와 실험의 최고권위자였지만, 교도소의 상황이 그를 압도하면서 이성적 사고를 잃게 된다.

1920년대, 세계로부터 고립된, 생산력이 극도로 파괴된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의 최고 정점에 선 볼셰비키들은 바로 상황의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트로츠키

결국 트로츠키는 두 번의 기회를 날려버린 후에 세 번째 기회가 왔을 때 전력을 다해 스탈린에 맞선다. 늦었지만 웅장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추방된다.

혁명을 일으킨 민중, 최고의 민주주의를 구현했던 국가가 어떻게 이렇게 단시간에 무기력해질 수 있었던 것일까? 신념을 가진 좌파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볼 법한 문제다.

해답은 너무도 쉽게 마르크스주의가 제공한다. 사회주의는 물질적 조건을 건너뛰면서 실현될 수 없다. 사회주의는 국제적 생산력을 동원해야만 가능하다.

독일 혁명이 실패하고, 뒤이은 가능성이었던 중국 혁명마저 실패했을 때, 소비에트 공화국이 내부에서 더이상 회생 불가능함이 입증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사 당시 가장 생산력이 발달한 국가였다고 해도 오랜 고립을 버티며 민주주의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생산력이 낙후해있던 소비에트 공화국보다는 좀더 오래 버텼을지 몰라도 말이다.

결국, 국제 혁명의 실패는 "그럼 어떻게 국가를 유지할 것이냐?" 하는 질문을 던졌다.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트로츠키는 국제주의의 편에 섰다. "다른 혁명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

스탈린과 부하린은 민족주의 편에 섰다.(비록 그 자신들은 그것을 민족주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라도 말이다.) "소비에트 공화국은 자력갱생할 수 있다."

그리고 스탈린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노동자의 피를 요구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노동자 국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의 피 위에 서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은 부르주아 국가에 사는 사람들이 흔히 직면하는 상황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일컬어 "국가가 인민으로부터 소외된다"고 했다. 정확한 말이다. 부르주아 국가에서 늘상 있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국가와 국민의 대립." 국민은 국가로부터 소외되고,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소외된다.

소련에서 펼쳐진 "국가와 국민의 분리"는 다음 두 명제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1.노동자 국가는 노동자 위에 군림한다.

2.스탈린의 소련은 노동자 국가가 아니었다.

비록 트로츠키는 명확히 2를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2번 명제로 가는 길을 닦았다. 트로츠키는 평생 스탈린을 비판하며 소련은 "관료적으로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고 말했고, 정치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추방당한 예언자

곧 3권, 추방당한 예언자를 읽게 된다. 아마도 모스크바 재판 이야기가 나오겠지. 이 재판에서 1917년 혁명을 이끌었던 쟁쟁한 혁명가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전락해 최후를 맞이하는지 나와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궁금하다.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 그들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트로츠키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투쟁했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