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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파시즘이 대중운동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책, 《파도》

《파도》, 토드 스트래서 지음, 김재희 옮김/이프(if)

파시즘을 교실에서 실험해 본다? 감히 생각지도 못할만한 일이 실제로 독일에서 있었다.

평범한 역사 수업 시간, 학생들은 독일인의 다수가 파시즘을 지지했고, 특히 끔찍한 학살들에 대해 동시대 독일인들이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는 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민주적인 교실이라면 당연히 나올 법한 질문을 던진다. “왜 그랬죠?”

열정적인 초임 역사 교사였던 벤 로스는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몰랐다.

돌아가서 온갖 책을 찾아봤다. 어디에도 답은 없었다.

열정적인 교사였던 로스는 생각한다. 교실에서 파시즘을 실험해보자. 그리고 뼈에 각인시킬 교훈을 함께 배워 보자.

이렇게 시작한 교실 실험은 생각지도 못한 데까지 나가는 결과를 낳는다.

처음 신문기사에서 이 책의 소개를 읽고 꼭 한 번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교양인’에서 나온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끌렸는지도 모른다.

읽은 소감은 이렇다. “파시즘의 대중운동 면모를 잘 밝혔다. 그러나 다른 점들에서는 파시즘을 오해할만한 소지가 있다. 그럼에도 훌륭한 책이다.”

1.대중운동으로서의 파시즘

흔히 권위주의를 파시즘과 혼동하곤 한다. 또다른 흔한 혼동은 ‘다 같이 하자!’ 라는 말과 파시즘을 혼동하는 것이다.

북한 군인들의 기계적인 행군을 보면 전체주의라는 단어가 떠오르고 곧 파시즘과 연결되지만, 군부독재가 곧 파시즘인 것은 아니다. (북한은 군부독재라 할 만하다. 역사에서 이런 정권은 흔히 권위주의정권이라 불린다. 파시즘과 권위주의 정권은 구별된다. 자세한 내용은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을 참고하라.)

그러나 권위주의 정권과 파시즘은 다르다. 많이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대중운동이냐 아니냐다.

권위주의 정권은 가장 좋을 때조차 대중의 수동적 지지에 기댄다. 권위주의 정권은 대중을 물건 부리듯 동원한다. 이들은 대중운동은 우파적이든 좌파적이든 기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파시즘은 다르다. 파시즘은 출발부터 대중운동이다. 대중의 열정적인 호응이 없이 파시즘은 성립할 수 없다.

파시즘이 무서운 이유는 대중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이 아무리 독재로 반동하려 해도 우리가 하는 말 한마디 한 마디를 모두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파시즘은 가능하다. 책을 잠깐 인용해 보자. 꺽쇠괄호[] 안은 이해하기 편하도록 내가 덧붙인 것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로 짐작하건대 [파시즘] 집회는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같은 시각, 그녀[주인공, 파시즘에 저항한다]는 체육관 지하 학보편집실에서 뒤숭숭한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그 방이 아니고는 몸을 숨길 곳이 업었다. 왜 집회에 오지 않았냐고, 만나는 애들마다 물어볼 텐데, 신문 마감에 쫓겨 그랬다는 설명말고 달리 변명거리를 찾기 힘들었다. 솔직히 말해 이건 도피였다. 하지만 로리[주인공]는 지금 자기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괴상망측하게 복잡한 사정은 바로 사태의 심각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파도’[책 중 파시즘 단체의 이름]와 하나가 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어딘가로 몸을 숨기든가! 이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파시즘은 대중운동이다. 개인개인이 파시즘에 열광한다. 내 친구도 파시즘에 열광한다. 아버지 어머니도 파시즘에 열광한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감시한다. 이 철저한 족쇄, 이것이 파시즘이다.

대중운동으로서의 파시즘을 잘 다룬 글을 하나 소개한다. 도움이 될 것이다.

존 몰리뉴,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이명박이나 ‘다 같이 하자’주의를 파시즘이라고 이름붙이다가는 진정한 파시즘의 위협을 간과할 수 있다. 이것은 저명한 파시즘 연구가 로버트 팩스턴의 말이다. 《파시즘》의 저자인 로버트 팩스턴은 파시즘 분야의 대가로 불리니, 권위를 빌어다 말해도 무리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명박 정권을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것에 ‘열정적으로’ 반대할 생각은 없다. 내가 그렇게 부르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히틀러처럼 나쁜 짓하는 것은 매한가지니 뭐.)

2.그러나 부족한 점

소설이다보니 불가피하게 생기는 엄밀치 않음은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옥의 티일 뿐 이 소설의 전체적 장점을 뒤엎을 정도는 아니라는 점을 밝혀 둔다.

하나, 《파시즘》에도 나오는 바인데, 파시즘이 득세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조건이 잘 맞아 떨어져야 한다. 자본주의 자체가 엄청난 위기에 부딪혀야 한다. 또한 보수적 세력과 진보적 세력을 포함해 기성 정치세력들 중 어디도 정치적 대안을 제공하지 못할 때 파시즘이 성장할 조건이 마련된다. 특히 독일에서는 사민당과 공산당의 분열이 파시즘 성장에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그럴 때조차 파시즘이 필연적으로 정권을 잡는 것은 아니다. 파시즘 자체도 권력에 다가서기 위해 순수주의를 버려야 한다. 권력을 위한 타협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이런 조건 하에서 파시즘은 성장한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마치 그냥 집단을 만들고, 지도자를 포장하고, 집단적 광기에 휩사이도록만 만들면 파시즘은 언제든 발호할 수 있는 양 묘사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누구든 파시즘과 관련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심지어는 개인과 집단 자체를 대립시키면서 집단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나쁜 집단과 좋은 집단이 있다고 생각한다. 집단 자체가 악은 아니지 않은가.

3.결론

위에서 쓴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파시즘의 중요한, 그러나 간과되기 쉬운 특징인 대중운동으로서의 파시즘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재밌다. 새벽 1시부터 4시까지 잠도 못 자고 단숨에 책을 읽어내려간 것은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경제 위기가 (한국에서는 아닐지라도) 세계에서 파시즘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제공할지도 모르는 지금, 이 책을 읽으며 파시즘의 위험에 경각심을 가지며 비판적 지성을 갈고닦는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파시즘》에서도 말하는 것처럼 파시즘의 위협은 과거지사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상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서 파시즘이 이른 시일 내에 발호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