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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범인 얼굴 공개 ─ 흉악 범죄와 자본주의

예전에 〈저항의 촛불〉에서 ‘흉악 범죄와 자본주의’라는 칼럼을 실은 적이 있다. 강 모씨의 흉악한 범죄들이 드러난 이 때 자본주의 지배자들과 언론이 이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듯 싶어 그 칼럼을 되새기며 지금 사건을 돌아보려 한다.

단, 뚜렷이 못박는 것은 내가 어떤 의미에서도 강 모씨 그새끼를 옹호하려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강 모씨가 미친 놈이고 나쁜 새끼라고 생각하지만, 이명박도 증오할 뿐이다. 그리고 이명박과 이 체제는 예전 BBK때 파트너를 이용해먹은 것과 꼭 마찬가지로 강 모씨 사건을 이용해 선량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데 쓰려 한다.

선천적 악마에 대한 두려움

‘흉악 범죄와 자본주의’에서 존 몰리뉴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모든 나라에서 때때로 특정 개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다. 이런 범죄가 성(性) 관련 범죄일 경우 사람들은 특히 불안해 하는 경향이 있고, 어린이가 피해자나 가해자일 때는 훨씬 더 불안해 한다. …

우리 지배자들에게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이고 따라서 위로부터 통제될 필요가 있다고 우리가 믿는 것이 대체로 이롭다. … 끔찍한 범죄가 발생하면 그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악하다는 메시지를 언론이 사람들에게 주입하기 아주 좋은 기회가 된다. …

지배계급은 또, 우리가 우리끼리 서로 두려워하기를 바란다. 외부의 적(테러리스트나 공산주의자), 이주노동자, ‘무서운 십대’나 학교 폭력 써클(조직 폭력배), 연쇄살인에 맛들여 수풀 속이나 오솔길에 숨어 있는 남자를 두려워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더 많이 두려워할수록 우리의 자신감은 줄어든다. 우리가 이웃과 직장 동료들을 두려워할수록 지배자들에 맞서 단결하기는 더 힘들어진다. 우리가 더 원자화되고 고립될수록 우리의 저항력은 약해진다. 범죄에 대한 두려움, 특히 흉악 범죄에 대한 두려움은 일반적 두려움을 증폭시키고 지배자들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데 쉽게 이용될 수 있다.

철거민들의 안타까운 죽음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또 한 번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게 기대한다. 이 정부는 서민을 적으로 삼는 정부기 때문이다. ‘저항하는 서민’은 이명박에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적’이다. 경찰의 살해는 이명박에게 있어 그냥 ‘적’을 죽인 것일 따름인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개개인에 대한 두려움을 강화하고, 사람들 사이에 불신을 조장하는 것은 이명박에게 득이 된다. 아니, 정확히 말해 지배계급 전체에 도움이 된다. 지배계급 개개인이야 그렇게 생각 안 할 수도 있지만, 조중동처럼 조직화된 세력은 그 지점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황색 저널리즘도 한 몫 하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들 사이의 전반적인 불신 조장, 원자화, 고립감을 느끼도록 하기. 지배계급은 이런 분열통치가 효과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불신을 조장하기 위해 저들은 ‘과학’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미신을 널리 유포한다.

‘뉴스후’ 연쇄살인범 강ㅇㅇ ‘유영철 정남규 잇는 사이코패스인가?’(이미혜, joins.com) - joins.com은 중앙일보의 웹사이트다.

강ㅇㅇ, ‘살인을 위한 살인’ 즐겨 (dongA.com, 2009.1.31)

강ㅇㅇ "신앙으로도 살인충동 제어 못했다"(chosun.com, 2009.2.1)

위에 인용한 기사들은 하나같이 강 모씨가 저지른 흉악 범죄의 원인을 알 수 없는 살인충동으로 돌린다.

그럼 결론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학교, 직장, 거리에서 누가 언제 우리를 갑자기 유인해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사는 수밖에 없다는 게 된다. 생각해 봐라. 편의점 알바랑 우연히 눈이 마추쳤는데 무서워 벌벌 떠는 자신의 모습을. 음… 촛불집회에 갔다가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언제 나를 살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무서워서 촛불이나 들 수 있을까? 좀 비약인가? 여튼, 저들이 노리는 건 딱 이런 거다. 택시를 탈 때 항상 번호판을 보는 우리 모습을 생각해 보면 저들이 조장하는 두려움이 결코 환상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하긴, 이 두려움이 단순히 환상인 것만은 아닌데, 나도 내 여자친구가 혼자 택시타고 가면 두려워서 번호판을 외운다.

그래, 마르크스주의자의 설명은 이런 거다. 이런 두려움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두려워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냥 온 세상이 지뢰밭이라서라는 얘기냐? 그냥 언놈이 갑자기 미쳐서 그렇게 될 지도 모르니까 조심하고 사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결론지어아 하냐? 이런 얘기라는 거다.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거다. 마르크스주의의 설명은 사실 이런 흉악 범죄가 발생하는 데 이명박 같은 지배계급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당연히도, 우리는 이 흉악 범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해결이 가능한 걸, 지배자들은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놔둔다는 거다. 이게 진짜 문제 아닌가?

기계적 설명의 난점

사실 몇몇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을 들어보면 말은 맞게 하는데, 좀 ‘와닿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존 몰리뉴의 글 중 일부도 사실 그런 느낌이 없는 건 아니다.

첫째, 우리는 이런 흉악 범죄들(아동 성추행ㆍ살해, 연쇄강간ㆍ연쇄살인 등)이 매우 드물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한다. 전체 범죄발생률이나 범죄가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에 미치는 실제 영향은 언론 보도가 시사하는 것보다 더 낮거나 미약하다. 특히, 가장 끔찍한 범죄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실제로, 범죄보다는 실업, 물가인상, 집세 인상, 사회복지 삭감, 질병, 교통사고, 가정 내 사고, 전쟁, 기후변화 따위가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과 복지를 훨씬 더 크게 위협한다.

바로 이런 설명이다. 그래서 이런 독자편지가 실린 적도 있다. (몰리뉴의 글에 대한 건 아니었다. 다른 글에 대한 편지다.)

잔혹한 성범죄를 보면서 많은 평범한 사람들도 성범죄자 처벌 강화에 찬성하는 지금, 결론으로 체제에 맞서 싸워야 할 필요만 언급한 것은 추상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체제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전철희, 아동 대상 성범죄 기사를 보고, 〈저항의 촛불〉 독자편지, 2008.4.28

흉악 범죄 때문에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는데 그 앞에서 존 몰리뉴의 저 말을 그대로 읊으면 “야이 꽉 막힌 사회주의자야 너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하고 공개 망신을 당해도 지지해 주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다. (물론, 존 몰리뉴의 글도 이 사건이 어느정도 잠잠해진 다음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내용을 씹어 보며 읽으면 그렇게 무심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슬픔에 공감하는 휴머니스트이므로.)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닌 법,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흉악 범죄까지 이용해 먹는 지배자들의 의도를 잘 읽어야 한다. 휘둘리면 안 된다. 그리고 흉악 범죄를 포함해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일에 쟤들이 책임 있다는 걸 제대로 그리고 똑바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따위 대책으로 흉악 범죄 재발은 당연

이렇게 말해야 한다. 재발 방지 대책을 제대로 세우라고. 그리고 그건 복지 강화에 있다고. 처벌 강화? 그건 지배 계급의 이익에 충실히 복무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존 몰리뉴는 같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주 설득력있다.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강조해 놨다.

범죄의 가해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모두 겪는 소외ㆍ억압ㆍ착취의 끔찍한 압력에 짓눌려 망가지고 부서지고 산산조각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소외ㆍ억압ㆍ착취의 압력은 우리 모두의 삶을 어느 정도 일그러뜨린다. …

구체적 사실들을 무시한 채 모든 범죄를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만병통치약 같은 범죄 이론이나 해결책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맑스주의자 는 생물학적 또는 ‘유전적’ 설명보다는 사회적ㆍ심리학적 설명에 훨씬 더 무게를 둬야 하고, 초자연적ㆍ미신적 설명에 철저하게 반대해야 한다. 이 말은 빈곤이나 실업이나 그와 비슷한 객관적 결핍 때문에 사람들이 강간ㆍ살인ㆍ아동학대를 저지른다(그런 요인들이 마치 유아사망률을 높일 수 있듯이)는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그런 사회적 요인들이 어떻게 개인의 특수한 경험 ─ 가족 내에서의 또는 어린 시절의 ─ 과 맞물려서 인간성의 붕괴 가능성을 증대시키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는 ‘사회적ㆍ심리학적’ 설명에 무게를 두고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그런 사회적 요인들이 어떻게 개인의 특수한 경험과 맞물려서 인간성의 붕괴 가능성을 증대시키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말은 꼼꼼이 새겨 읽을 말이다.

지배자들은 서민들의 삶을 짓누른다. 청년실업 1백만이 넘도록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는다. 강부자들을 위해 서민들의 지갑을 턴다. 촛불 수배자를 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정부가 가정폭력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캠페인도 제대로 벌이지 않는다. 공공선을 위한 캠페인에 실질적 예산이 대규모로 투입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심지어 있는 복지예산도 자기들 이익을 위해 깎기 일쑤고, 국민들이 직접 모은 국민연금도 지들 이익을 위해 주식투자 하다가 날려먹는다.

이런 온갖 사회적 스트레스가 누군가의 인간성을 붕괴시키고, 그 인간이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지경까지 가면 지배자들은 “충격”이라고 논평을 낸 후 예산은 단 한 푼도 들지 않는, 사형제 강화 같은 대책을 내놓는다.

좀 더 예산을 들려 내놓는 대책은 꼭 흉악 범죄자에게만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예컨대 CCTV를 무지하게 설치해서 꼭 흉악범죄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통제할 수 있게 한다거나, 경찰력을 강화해서 언제든 정권 반대자를 때려잡는 데 도움이 되게 한다거나 하는 대책이다. 그리고 이런 게 실질적으로 흉악 범죄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냐? 그 돈을 복지 예산에 투입하면 흉악 범죄는 훨씬 줄어들 거다.

범인 얼굴 공개

얼굴 공개라… 일단 ‘공익’을 보수언론이 맘대로 재단할 수 있나 하는 문제가 있다. 〈조선일보〉는 강 모씨의 얼굴을 공개하며 이렇게 썼다.

형사피의자나 참고인의 사진 보도 여부를 ‘공익과 공공성을 최대한 고려해’ 언론사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허용의 폭을 더 넓혔습니다.

미국의 경우, 아동 성범죄자나 총기 살인 미수범처럼 살인을 저지르지 않아도, 보도로 인한 공익이 더 크고 대중의 관심이 쏠려 있으면 과감하게 얼굴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독자여러분께 범인사진을 공개합니다, 〈조선일보〉, 2009.1.31

 

처음부터 끝가지 공익 공익 운운하는데, 강 모씨 얼굴을 공개해서 얻는 공익이 뭔지 실체를 밝혔으면 한다.

내가 강 모씨 그놈의 ‘인권’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다. 난 대책없는 휴머니스트는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강 모씨야 뭐 진짜로 쳐죽일 놈이고 범죄자가 확실하다고 하자. 그런데 이번 일이 선례가 되어 다음 번에 쌩뚱맞게 얼굴이 공개돼 피해입는 사람이 발생하면 어쩔 텐가?

얼굴 공개로 시선이 쏠려 있다. YTN 보도에도 철거민 이야기보다 강 모씨 이야기가 앞에 등장했다. 강 모씨의 흉악 범죄, 처단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방식이 잔인하다고 해서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이명박이 저지르고 있는 이 서민 말살 정책은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죽일 것이다.

소리 없는 죽음이 계속될 것이다. 죽인 사람 없는 타살이 계속될 것이다. OECD 자살증가율 1위를 차지한 바 있는 대한민국, 장롱 속에서 아이가 굶어 죽은 채로 발견되는 대한민국, 전깃세 낼 돈이 없어 촛불을 켜고 자다가 불에 타 죽는 서민이 있는 대한민국, 노숙자들이 얼어 죽어서 노숙자 수가 줄어들고 그걸 성과로 내세우는 대한민국, 높으신 분들이 한 끼 30만 원짜리 식사로 파티를 즐길 때 30만 원이 없어서 자살하는 국민이 있는 대한민국.

살 길 없어 저항하다가 ‘특공대’와 깡패에 몰매를 맞고 불에 타 죽어야만 하는, 배제된 국민으로 가득찬 대한민국. 이런 문제보다 흉악범의 일상생활ㆍ범죄 재연이 훨씬 더 중요하냐 이런 말이다.

결론

흉악범. 나도 증오스럽다. 나도 어느 정도는 두렵다. 언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내 가족 중 누군가가 이런 일을 당하면 나도 분노할 거다. 그자식 때려 죽이고 싶을 거다. 복수하고 싶을 거다. 사실, 자본주의가 조성한 환경은 사회를 점점 더 ‘지뢰밭’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낳는 비참함을 더 널리 알려야 한다. 그래서 싸워야 한다. 사람들을 묶어내야 한다. 흉악범의 소소한 모든 것을 공개하며, 모든 뉴스보다 그것을 앞세우는 것은 흉악 범죄를 뿌리뽑는 데도 도움이 안 된다. 흉악 범죄의 위협보다 더 큰 위협들을 제거하는 데도 도움이 안 된다.

강 모씨로 시끄러운 지금을 보면서, 내가 하는 생각이다. 존 몰리뉴가 쓴 저 글은 충분히 가치있다.

1980년 5월의 광주에서는 단 한 건의 범죄도 없었음을 기억한다면, 더 나은 사회가 그리 멀리 있지는 않다는 것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사회 ─ 흉악 범죄 없는 사회 조차도 이명박과 지배자들은 우리에게 선물해 주지 못한다. 그건 우리 손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