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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광고 후기 시대 미디어의 오래된 미래 — 뉴스가 19세기로 회귀중인 이유

〈아틀란틱〉의 “The Media’s Post-Advertising Future Is Also Its Past — Why the news is going back to the 19th century” 번역이다. 원 저자는 데렉 톰슨(Derek Thompson), 역자는 이원웅이다. 2019년 2월 13일에 번역했던 것을 지금 올린다.


이 글은 신문이란 매체가 오늘날 처한 환경을, 수입원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적 사례와 비교해 다룬다.

글의 필자는 20세기에는 광고 덕에 수익성이 좋았던 뉴스 산업이, 오늘날에는 광고를 여러 곳에 빼앗기면서 위기를 겪고 있다고 진단한다. 구글, 페이스북, 심지어 아마존까지 신문의 광고를 빼앗아가고 있다. 여기까지는 흔히 볼 수 있는 분석이다.

이 글이 흥미로운 지점은 그것이 신문의 논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역사적으로 살펴 본다는 데 있다. 데렉 톰슨은 18-19세기 미국 신문들을 살펴 본다. 당시 신문은 주로 정치 세력의 후원을 받았고, 주로 당파성이 강했다. 19세기 미국에서 이런 신문은 1200개나 됐다. 경쟁하는 여러 당파적 신문이 미국 민주주의에 도움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제랄드 J. 발다스티).

오늘날 정상적 신문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객관적 저널리즘”이, 사실은 신문의 주수입원이 바뀌면서 등장한 것이라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20세기 들어 신문은 백화점 같은 큰 기업의 광고를 싣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많은 돈을 벌면서 수익성 좋은 산업이 됐다.

신문의 목적은 특정 정치 세력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광고를 보여 주는 것이 됐다. 그에 따라 신문의 논조는 비정치적으로 변해야 했다. 물론 “저널리즘”과 수익성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은 있어 왔지만, 근본에서 신문 “산업”을 규정하는 것은 광고주인 기업과 신문 산업 자본의 이해관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광고 수익이 줄고 구독자로부터 오는 수입이 늘어나는 상황은 19세기 정치 세력의 후원을 받던 신문과 좀더 유사한 상황이며, 그에 따라 논조도 좀더 주관적으로 변하게 되리라는 것이 이 글 필자의 분석이다.

객관적 저널리즘이 사실 “객관”보다는 수익 구조와 연관돼 있다는 사실은,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온 사회주의 신문들이 (흔한 비난처럼) “편파적”이라서 언론의 카테고리 밖으로 제거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문의 한 유형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그리고 자본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지 않는 신문이라는 것을 더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 흥미로운 글을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란다.


[…] 작년에 필자는 디지털 업스타트와 유서 깊은 브랜드 모두에게 닥칠 미디어의 종말에 대해 쓴 바 있다. 〈바이스(Vice)〉와 〈버즈피드〉는 예상 수익을 수천억 달러나 줄였으며 〈뉴욕타임스〉는 광고를 급격히 줄였다고 발표했다.

열두 달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종말은 되풀이되는 중이다. 복스 미디어(Vox Media), 〈바이스〉, 〈버즈피드〉는 인력을 감축했고(합병을 한다는 미심쩍은 소문도 돈다). 〈Mic〉는 한 때 가치가 1억 달러에 달했지만 대부분의 직원을 해고했으며 500만 달러에 매각됐다. 버라이즌은 디지털 미디어 부문(AOL과 야후도 여기에 포함된다)에서 50억 달러를 감축했다. 로이터는 앞으로 2년 동안 3000명 이상을 해고할 계획이라 한다. 이 환란은 광범위한 것으로 보이며, 촉망받는 벤처 자본과 오래된 브랜드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지역 뉴스를 초토화하고 국제 뉴스도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거의 모두가 안전하지 않고 거의 모두가 매각을 해야할 지경이다.

이것을 구글과 페이스북의 복점의 필연적인 결과로 생각하기 쉽다. 두 기업은 이미 디지털 광고에 쏟아부은 돈의 절반 이상을 회수했고, 디지털 광고 판매 수익 성장의 90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러나 미디어계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은 더 복잡하다. 지금의 현상은 네 가지 경향이 수렴한 결과로 보인다.

[참고: 실리콘 밸리가 저널리즘을 장악했을 때]

1. 지나치게 많은 경쟁자

페이스북과 구글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거대 기술 기업이 광고 사업을 고려하고 있다. 거의 모든 거대 기술 기업이 광고 수입을 둘러싼 경쟁에 뛰어든다는 것이다.

아마존의 광고 사업은 지난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아마존의 광고 부문의 성장은 구글과 페이스북은 물론 거의 모든 주요 기술 기업의 광고 부문의 성장을 능가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을 보면 애플은 스냅챗이나 핀터레스트 같은 주요 앱에서 광고 수익을 얻어낼 기술을 만들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비즈니스 중심 SNS인] 링크드인과 [검색 엔진인] 빙 덕분에 올해 40억 달러의 광고 수익을 낼 것이라고 한다. 우버는 다가올 IPO를 장식할 새로운 수입원을 찾기 위해 광고 사업에 뛰어든다는 소문이 있다. AT&T는 타임워너[HBO, 워너 브라더스 등을 거느린 미디어 회사]의 콘텐츠에 투자한 것과 연계하여 광고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으며, 스트리밍 TV 장비를 판매하는 로쿠도 광고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오라클, 어도비, 세일즈포스는 자사의 클라우드 기술을 이용해 광고 타게팅을 위한 데이터를 수입하고 있다고 〈액시오스(Axios)〉는 보도했다.

이 기술 기업들은 기존 미디어 기업은 꿈도 못 꿀 만큼의 청중과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더 많은 광고는 인공지능 기반 프로그램에 의한 광고 매출로 쏠릴 뿐만 아니라, 뉴스 취재 사업을 주되게 하지 않는(혹은 전혀 하지 않는) 기업들로 쏠릴 것이다.

2. 구원자의 부재

광고가 디지털 플랫폼으로 이동하자 뉴스 미디어는 영웅을 찾기 시작했다. 한 때는 아이패드가 미디어를 구원할 것이라 했다. 그 다음은 벤처 자본이었다. 그 다음은 “뉴스판 훌루”가 신비로운 가능성으로 떠올랐다[훌루는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기업이다]. 그 다음은 페이스북의 비디오 플랫폼이었다. 아, 팟캐스트도 있다!

이 모든 구원은 일시적이었거나 허상이었다. 아이패드는 여러 목적에 훌륭하게 쓸 수 있는 물건이었지만 20세기 중반의 비즈니스 모델을 소생하는 데는 쓸모가 없었다. 벤처 자본은 미디어 기업이 당연히 기술 회사만큼의 수익을 낼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어느 저널리스트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진실, 즉 뉴스는 이윤을 쏟아내는 화수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많은 수가 철수했다. 페이스북에서 잘 나가던 〈Mic〉와 같은 기업들은 훌륭한 셋방살림으로 칭송받는 길을 걸었지만 소셜네트워크가 우선 순위를 변경하자 거리로 나앉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참고: 페이스북과 스냅챗은 새로운 텔레비전]

3. 각본의 부재

뉴스 조직들은 온갖 실험을 닥치는 대로 했다.

지난 2년 동안 많은 뉴스와 간행물들은 구독자를 중시하는 쪽으로 사업 방향을 바꾸었으며 광고에서 잃은 수익을 메꿔 달라고 독자에게 호소했다. (〈아틀란틱(The Atlantic)〉이나 〈코레스폰던트(The Correspondant)〉와 같은) 일부 간행물과 신문들은 열혈 독자에게 구독만 하지 말고 프리미엄 회원이 돼서 좋아하는 저널리스트를 더 깊이 파고들어 보라고 호소한다. 〈액시오스〉, 〈크룩드 미디어(Crooked Media)〉, 〈버즈피드〉, 〈바이스〉, 〈복스(Vox)〉는 TV 프로덕션 스튜디오를 증축해서 HBO, 넷플릭스에 쇼를 판매하고 있다. 〈버즈피드〉는 뉴욕에 가게를 열었고 월마트에서 주방 용품을 판다.

그러나 저널리즘 형태의 일부는 결국 시장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이래로 미국 인구는 50퍼센트 늘었지만 지역 뉴스 기자의 숫자는 바닥을 치고 있다. 지역 언론의 쇠퇴는 시민 참여의 쇠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연구가 있다. 지역 뉴스가 공공재라면 당연히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어쩌면 정부 보조금의 형태로 말이다). 그러나 대중의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지푸라기를 잡는 행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4. 상이한 수준의 후원자들

한 때 대중을 상대로 한 기업 활동의 꽃으로 여겨지던 출판물들은 부유한 후원자들의 품 안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많은 유서 깊은 출판물들은 이미 백만장자와 억만장자에게 신세를 졌다. 〈타임〉은 세일즈포스 설립자 마크 베니오프(Marc Benioff)에게, 〈포춘〉은 태국 기업가 차차바르 쟈라바논(Chatchaval Jiaravanon)에게, 〈워싱턴 포스트〉는 아마존 설립자 제프 베조스(Jeff Bezos)에게 팔렸다. 억만장자 로렌 파월(Laurene Powell Jobs)이 설립한 조직인 에머슨 콜렉티브(Emerson Collective)는 2017년에 〈아틀란틱〉의 다수 지분을 매입했다.

화려한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메디치 가문 식의 후원자 모델을 경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억만장자가 후원하는 탐사보도가 있는 것이 탐사보도가 아예 없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후원이 뭐가 문제인가?

후원자는 사람이다. 사람은 언제나 마음을 바꿀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크리스 휴스(Chris Hughes)는 자신의 이상에 손실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를 폐기처분 했다. 필립 앤슈츠(Phil Anschutz)는 〈위클리 스탠다드(The Weekly Standard)〉를 그만뒀다. 마이클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는 대선에 출마하면 자신의 정치적 데스크를 매각하겠다느니, 수천 명을 고용한, 자기 이름을 딴 미디어 제국을 통째로 포기하겠다느니 떠들고 있다.

[참고: 미디어 불신 시대의 대학생 저널리즘]


이는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소식이다. 그러나 뉴스 산업은 언제나 불안정했다. 사실 앞으로도 미디어 조직은 구독, 후원, 사건이나 콘텐츠 저작권과 같은 보조 수입원의 이러저러한 조합으로 버텨낼 것이라고 내다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 벌어지든 광고는 덜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광고 이후 미디어의 미래를 이해하려면 과거를 잠깐 살펴봐야 한다. “당파 언론” 시기로 알려진 19세기 초에는 뉴스가 후원자에 의존했다. 그 후원자는 정치 정당이었다(따라서 그 언론은 “당 언론”이었다). 정치 정당은 선호하는 편집자와 인쇄 계약을 맺거나, 경쟁자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작가들에게 직접 보수를 주기도 했다.

이 시기의 저널리즘은 초정치적이고 근본부터 편파적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를 더 매력적으로 보는 역사가들도 있다. 1700년대 후반에 수십에 불과했던 미국의 지역 신문 숫자는 1830년대에는 1200개로 늘어났다. 뉴스는 다양한 저널리즘 양식과 청중에 대한 호소로 실험을 했다. 워싱턴 대학 교수인 제랄드 J. 발다스티(Gerald J. Baldasty)가 주장했듯이 이 신문들은 독자들을 관심과 행동을 이끌어낼 집단으로 취급했다. 그 결과 19세기 중반에 투표율은 기록적인 수준으로 치솟았다.

당파 언론을 종식한 것은 광고였다. 광고 덕분에 신문들은 후원자에서 벗어나 현대의 “객관적” 저널리즘이라는 표준을 세울 수 있었다. 광고는 또한 백화점 같은 거대 광고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중립적이고 냉정한 양식의 보도를 낳았다. 광고에 기반한 거대 신문사들은 수익성 높은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 신문사들은 다채로운 독자의 참여와 관심보다는 밍숭밍숭한 보도를 더 강조했다.

뉴스 산업이 광고에서 후원자와 독자(즉 구독자)로 이전하면서, 언론은 “중립성”의 연옥에서 벗어나 20세기 중반 저널리즘의 눈으로 보기엔 외람된 방식으로, 세상만사를 직설할 지도 모른다. 언론은 다시 더 정치적으로 될 테지만 독자들의 관심과 참여를 더 끌어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예컨대 지난 몇 십년 동안 〈뉴욕타임스〉는 광고가 60퍼센트를 차지하는 수익 구조에서 구독료가 60퍼센트를 차지하는 수익 구조로 변화했다. 사업 모델이 바뀌자 보도 행태도 바뀌었다.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이자 위스콘신 대학 교수인 고(故) 제임스 L. 보먼(James L.Baughma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60년과 2010년의 보도를 비교해보라. 보도가 더 주관적이다.”

20세기 중반의 신문은 백화점만큼이나 광범하고 무난했다. 그들의 사업은 백화점 광고였기 때문이다. 미래의 뉴스 미디어는 자신의 청중들만큼이나 혼잡하고 다양하고 극도로 논쟁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후원자와 독자들에게서] 직접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뉴스 산업이 맞은 새로운 도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필자에게 모든 국민이 “일련의 사실”에는 동의할 수 있는 시절로 되돌아 가는 것이 가능한지를 묻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1950년대를 그리워 한다. 텔레비전 채널 숫자를 손으로 꼽을 수 있고 월터 크롱카이트(Walter Cronkite)[미국 CBS 저녁 뉴스 진행자]와 지역 독점 매체에 정보의 흐름을 맡긴 그런 시절을 말이다.

그런 과거는 죽었고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더 과거로 가속하고 있다. 마치 20세기를 지나 더 멀고, 더 불안하고, 어쩌면 더 신나는 과거이자 미래인 시간으로 가는 타임머신 안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데렉 톰슨(Derek Thompson)은 경제, 노동 시장, 그리고 미디어에 관해 쓰는 〈아틀란틱〉 기자(staff writer)다. 《히트 메이커스》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