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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네덜란드 ─ 4번째 혁명

이 글은 한강의 붉은별 블로그에서 퍼온 것이다. 네덜란드의 부르주아혁명에 대해 다루고 있는 보기 드문 자료기 때문에 퍼왔다.

나는 퍼올 때 전문을 다 퍼오지 않는다. 따라서 앞부분을 여기서 읽고 흥미가 있다면 직접 링크를 타고 들어가서 읽으시기 바란다. 링크는 퍼온 부분의 끝에 있다.

원문에는 서문 격의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은 인용하지 않았다. 원문을 읽게 되면 그 부분도 읽기 바란다. 서문에 언급된 이스터섬 사례도 정말 흥미로운 주제다.

네덜란드의 황금 시대

나는 17세기 초반의 네덜란드 사회에 관해 말하려고 한다. 네덜란드 역사에서 이 시기를 “황금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당대의 번영했던 예술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네덜란드의 상인, 은행가, 제조업자들이 쌓아올렸던 엄청난 부를 언급하는 것이다. 신생 독립국 네덜란드 공화국의 발전과 저지대 남부 지역(벨기에 지방)의 정체가 보여주는 인상적인 격차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다. 17세기에 마침내 합스부르크가의 속박에서 해방된 북쪽 지방이 경제 도약과 번영을 구가한 반면 남쪽 지방은 이후 오랫동안 정체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네덜란드 독립 혁명은 유럽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과소평가된 사건 가운데 하나다. 15세기에 저지대(low lands, 오늘날의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로 그 당시에는 국가를 형성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부르고뉴 공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일련의 상속 과정을 거쳐 이 지역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에스파냐의 국왕이었던 샤를 5세에게 넘어갔다. 1555년 샤를 5세가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두 아들에게 물려준다. 독일의 대부분과 이탈리아 북부를 아울렀던 신성로마제국은 페르디난트에게,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영토는 펠리페에게 돌아갔다. 펠리페 2세는 강력한 반종교개혁의 주창자로 네덜란드 지역에서 성장하고 있던 개신교 신앙을 탄압하는 정책을 폈다. 그는 1567년 알바공(Duke of Alva)에게 1만 명의 군사를 주고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네덜란드 남부 지역(겐트, 안트베르펜, 브뤼셀이 이 지역에 있다)에서 알바공의 진압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벨기에인 이 지역은 계속 에스파냐령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게 된다. 반면 북부 지역에서는 오랑예공 윌리엄의 지도하에 저항이 계속되었다. 반란은 1579년 위트레히트 연합(Union of Utrecht)으로 끝났다. 주연합 공화국, 곧 네덜란드 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오랑예공 윌리엄이 네덜란드 총독이자 국가 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에스파냐와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네덜란드의 독립은 1609년에 체결된 12년간의 휴전 협정 이후에야 겨우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런 사정은 1648년 뮌스터 평화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불안하게 지속되었다. (후략)

▶ 전문을 보고 싶다면 다음 링크를 클릭하세요 : 혁명을 통해 사회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질적으로 도약한 사례--네덜란드 모형을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