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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드라마 <아이리스>를 보면서 숨이 막혀오는 이유

오랜만에 쓰는 글이 드라마 평이라 좀 뻘쭘하게 생각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뭐, 좌파라고 드라마 좋아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지난 주 금요일이다. 그 때는 11화가 끝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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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 난 아마도 <아이리스>를 끝까지 볼 것 같다. 난 작품을 크게 가리는 편은 아니다.

<선덕여왕>이 배울 점도 많고 생각할 거리도 많았을 것 같지만, 시간이 없는데 그 긴 드라마를 볼 자신이 없었다;;

<아이리스>의 장점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글은 단점을 다루려고 한다. 그러니 공정하게 장점부터 얘기하자.

작품을 내재적으로 비평할 것이냐, 내재적으로 비평할 것이냐 하는 것은 꽤 논란거리다.

지금 내가 하는 식으로 적용하는 경우도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이리스>의 경우에는 내재적으로 볼 때 정말 별볼일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음모론에 기반한 스토리 자체가 일단 개연성에 걸림돌이 된다. 신입인 김현준(이병헌 분)과 진사우(정준호 분)가 벼락 승진을 하는 것도 잘 이해가 안 된다.

분명히 독 안에 든 쥐 꼴임이 분명한데, 어떻게 빠져나오는지 설명도 없이 빠져나온다. 한마디로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고 엉성하다. 현준과 승희(김태희 분)가 '운명적 사랑'을 느끼고 '죽도록 사랑'하기에는 둘이 만난 시간도 너무 짧다.

정서에 맞는 전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외재적 조건'을 탁월하게 살리고 있다고 나는 본다. "지난 18일 '아이리스'는 34.1%(TNS 미디어코리아)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다 이유가 있다는 거다.

언론에서는 "톱스타 출연진과 화려한 영상미와 속도감 있는 전개로 고정 팬을 모으고 있다"고 말하는데 맞는 얘기다.

한마디로, '마케팅에 충실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들 눈길을 사로잡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떴다고 볼 수 있다는 거다. 속도감 있는 전개, 디테일 중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확실히 구분해서 중요한 부분만 강조하는 전술적 판단, 이런 것들에서 <아이리스>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포위상황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나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거다. 김현준과 최승희의 심리, 그들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아이리스>를 첩보를 빙자한 연애물이라고 하는 말도 들었는데, 틀린 말 아니다. <아이리스>는 그렇게 하는 게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듯하고, 그렇게 해서 성공했다. '외재적' 관점에서 볼 때, 즉, 드라마는 일단 시청률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점, 제작에 엄청난 돈을 들였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아이리스>가 독립영화는 아니다) 그게 욕이 될 성 싶지는 않다. <아이리스>에 그런 걸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음모론과 영웅, 그리고 엑스트라

이제 숨이 막혀 오는 이유를 말해야 겠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IRIS라는 배후조직이 한반도 상황을 쥐고 흔드는 것으로 묘사된다. 남북관계에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거기엔 백산 국장이 끼어있었다고 나온다. 박정희가 핵개발을 하다가 IRIS에 의해 암살됐다는 냄새도 풍기며, 핵개발에 관여한 과학자들을 IRIS가 암살했다고 한다. 심지어 아이리스는 서울 한복판에서 핵테러를 준비한다. 한마디로 거의 전지전능한 조직이다.

여기에 영웅이 끼어든다. 영웅은 전지전능한 조직의 음모에 맞서 싸운다. 그러다보니 전지전능한 조직보다 더 뛰어나거나 더 운이 좋아야 한다. 국가를 뒤흔드는 음모 조직을 뛰어넘는 영웅, 이건 말이 안 되는 설정이다.

하지만 통속극에 이건 기본 설정이다. 마치 판타지 소설에 불을 뿜고, 쇠보다 강한 비늘이 있고, 수백년을 살아가는 용족이 있듯이, 통속극에는 억세게 운 좋고, 말도 안 되게 강력한 주인공이란 게 꼭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비현실적 영웅의 존재가 실제하는 사람들과 만날 때다. 옛날 이야기에서야 영웅의 행적에 집중하고 영상으로 행적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 덜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름도 역할도 없이 죽어가는 엑스트라들

그런데 내가 가슴아팠던 것은 엑스트라들이었다. 이들은 현실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다. 즉,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벌써 1화 때부터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현준이 NSS 테스트실 문을 박차고 나올 때 평범한 연구원 하나가 죽었을지 살았을지 모르는 처지에 처했을 것이다.

문밖에 있던 공익으로 보이는 친구는 목에 바늘이 꽂혔는데 살 수 있을지 심히 걱정이다.

현준에게는 따듯하기만 한 선화도, 괜히 119 운전하는 공익근무요원을 죽인다.

지난 10화, 11화에서도 엑스트라가 무수히 죽었다.

유키는 현준이 슬퍼라도 해줬으니 그닥 안타깝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키 부모님은 그렇지 않다. 특히 아버지는 나온 적도 없는데 죽고 말았다.

NSS에 침투할 때는 경비 둘이 죽었다. 이들은 용역업체 직원이거나 NSS 비정규직일 텐데 말이다. 말도 몇 마디 못 해보고 죽었다.

한 인간이 죽을 때마다 세계 하나가 사라진다

위 소제목에 쓴 말은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의미심장하고, 내가 엑스트라의 죽음을 볼 때마다 불편하고 숨이 막히는 이유다.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은 현준처럼 비극적인 인생도 아니다. 현준처럼 암기력이 뛰어나지도, 억세게 운 좋지도, 강력한 스테미너를 자랑하지도 않는다.

최승희처럼 국내 최고의 프로파일러라서 사적인 감정으로 간첩 탈출을 도와줘도 멀쩡히 아무 징계 안 받고 회사에 복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 대부분은 주인공보다는 엑스트라에 가깝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말 한마디도 못하고 그냥 죽는다. (특히 선화에게 죽은 119 공익근무요원은, 운전대 놓고 도망갈 것이지, 사고 날까봐 운전대를 끝까지 붙잡고 있다가 죽었다.)

영웅과 엑스트라

영웅물은 영웅의 능력이 과장될 수밖에 없다. 모든 운을 영웅에게 몰아준다.

그게 통속극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TV에서 내재적 작품성이 뛰어난 문학성 있는 드라마를 하라고 요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웅물이 가진 내재적 한계라는 게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는 너무나 부조화스러운' ㅡ 영웅이라는 (드라마 속의) 존재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데서 온다. 영웅과 만나는 보통 사람들은 현실의 보통 사람들을 모델로 하지만 영웅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없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웅물의 근본적인 한계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