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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

용산참사 장례식을 보며 - 용산참사 항의 투쟁은 무엇을 남겼는가

2009년 1월 20일 아침. 용산 참사 소식을 듣고 놀란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경찰 진압으로 5명이 죽다니. 이 사건은 내가 들은 어떤 철거민 사건보다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용역 깡패 때문에 크게 다친 철거민들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떼죽음을, 그것도 경찰에게 당한 사건은 없었다. 이것이 이명박 정부의 본질이었다.

이명박은 철거민들의 죽음 직전에 "속전 속결"을 주문했다.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의 "과잉 충성"이 이 사건을 불러온 것일 텐데, 국민의 목숨보다는 자기 자리를 보존케 해 주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를 열심히 이행하는 게, 이 땅의 "공직자"들에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었다.

김석기 사퇴

그러나 김석기는 결국 내정자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용산 참사 항의 운동이 제2의 촛불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파괴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정말 싫었겠지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청장을 날려 버린 것이 바로 운동의 힘이었다.

살인정권 이명박 OUT 손팻말 들고 있는 집회 참가자들

△이런 운동의 힘이 바로 김석기를 물러나게 했다.


김석기 사퇴가 이 땅 '명빠'들에게 보여 준 것이 있을 것이다. "과잉 충성"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충성"도 좋지만 눈치 봐 가며 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 거다. 이런 교훈 말이다. 바로 이런 "실질적 교훈"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진척시킨다. 용산 참사 항의 운동은 일단 여기서 이 땅의 민주주의에 기여했다.

민주당의 뒤통수

그러나 민주당은 강호순 사건으로 용산 참사를 덮으려고 시도한 이명박 정권의 치부를 '운동'으로 지속하려 하지 않고, 국회 청문회로 끌고 들어갔다. 국회에서 청문회도 하고 운동도 지속해야 했다. 그래야 김석기 사퇴를 낳았던 것처럼 더 많은 성과를 거두고 이명박 정권을 코너로 몰아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국 (거칠게 말해) 청문회만 남은 용산 참사 항의 운동은, 사회 전체 이슈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즈음 씌어진 <레프트21> 기사를 보자.

최근에 민주당은 민생민주국민회의(준)의 이명박 1년 규탄 집회 공동 주최 제안도 거절했다.

민주당은 ‘불법시위가 될 것이 뻔한 상황에서 야당이 장외집회를 할 명분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지난 1년간 온갖 반서민 반민주 개악을 추진해 온 이명박 정부가 ‘속도전’으로 개악을 더 가속화하고, 심지어 연쇄살인사건까지 이용해 여론조작을 시도한 것이 드러난 마당에 ‘장외집회의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운동과 거리를 두면서 민주당이 내세운 것은 오로지 국정조사와 특검이다.

용산 참사 해결과 반이명박 투쟁에서 한 발 빼는 민주당

용산 참사 - 끈질긴 투쟁

이후 투쟁은 눈물겨웠다. 끈질긴 투쟁이 이어졌다. 이 불씨를 살린 것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었다. 용산 참사 현장에서 미사는 계속됐다.

6개월, 300일, 집회도 계속됐다. 사람들은 용산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이명박과 정운찬, 오세훈은 이 문제를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불은 꺼졌지만 불씨는 살아있었다. 언제 또다른 불과 만나 커질지 모르는 불씨였다. 용산 참사는 이명박 정부에게 원죄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친서민 중도실용 포장을 해도 용산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설득력이 없었다.

그래서 해결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끈질긴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용산 문제는 사람들 뇌리에 계속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해결된 것이다. 결코 정운찬이 괜찮은 놈이어서 해결된 것이 아니다.[각주:1]

남은 과제들

<시사IN> 121호에서 장일호 기자는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구속자 석방 등 유족들에게는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남았다"고 썼다.(끝나지 않은 용산, 2009년 12월32일, 2010년 01월 08일)

맞는 말이다. 같은 기사의 문정현 신부 말도 새겨 들어야 한다.

문 신부는 “아직 용산참사는 해결되지 않았다. 여기서 농성을 접는 것은 유족과 철거민의 뜻이지만, 문제의 본질인 재개발은 유유히 진행될 것이다. 용산참사와 같은 일이 도처에서 벌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달라진 점이 있다. 이제 철거민 문제를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국민들이 엄청나게 많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어제 홍대입구역 4번 출구로 나와서 직진하고 있는데 철거 직전의 가게에 붙어 있는 한겨레 기사를 읽게 됐다. 그 장소는 홍대 앞 두리반 식당이라는 곳이었는데, 용산 철거민들 같은 사례가 거기에서 또 재개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아래 링크로 읽으면 된다.

홍대앞 ‘작은 용산’ 두리반(철거민 운영 식당)의 싸움

[왜냐면] 홍대앞 ‘두리반 식당’을 빼앗지말라 / 박일환

위 기사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제 철거와 재개발 문제는 "작은 용산", "제2의 용산"이 됐다. 국민들은 "용산"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고통받는 약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것 또한 이 투쟁이 남긴 성과다. 그래서 앞으로 철거민들은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쉽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알리고, 싸울 수 있게 됐다.

어제 민중의 소리 메인 기사는 "편히 잠드시라..남은 우리들이 다시 시작하자"였다. 5명의 열사들은 저리로 떠났지만, 남은 우리들의 과제는 많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늘로 떠난 다섯 열사들이 남겨 준 것들이 있다. 방금 위에서 언급한 '변화'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을 끝까지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추천글 : [용산참사 장례식] 철거없는 세상 위한 산 자들의 다짐과 눈물

  1. 이런 오해 하는 사람도 많지는 않겠지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