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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회/토론회 후기

소외 - 마르크스의 방법 by 최일붕 (맑시즘 2011)

맑시즘 2011이 진행중이다.

최일붕의 강연은 늘 재밌지만 오늘 소외에 대한 강연은 참 인상깊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외가 바로 자본주의를 없애야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지금 청중토론이 시작됐는데 아이폰으로 발제를 받아적은 걸 바로 블로그에 올린다.

아이폰으로 적었기 때문에 오타가 많다. → 이후 컴퓨터로 수정을 봤다. 

소외 - 마르크스의 방법

최일붕

마르크스의 방법은 세 가지 다룬다. 소외 변증법 유물론이다.

소외를 다룬 책이 별로 없다. 1844년 경제 철학 초고라는 책을 마르크스가 썼는데 20년 전 박종철 출판사가 번역한 이후 다시 나오지 않는다. (사회자가 최근 다시 번역출판됐다고 정정함)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소외에 대해 다룬 것도 책으로 안 나왔다. 왜냐 스탈린주의자들이 소외란 개념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1844년에 쓴 초고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가 1930년대에야 출판됐다. 그리고 이를 진정으로 사상적 무기로 사용하려한 것은 1950년대 동유럽 지식인들이었다. "이거야 말로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 입장에서 비판한 저작이다" 하며 쾌재를 부르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은 그래서 소외를 다루지 않고 억눌렀다.

심지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저작은 초기의 인본주의적 저작과 후기의 과학적 저작으로 나뉜다. 둘 사이엔 인식론적 단절이 있다"며 소외 개념을 기각했다. 심지어 전과학적이라고 했다.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역시 90년대 초까지 스탈린주의가 지배했기에 이렇게 된 거다. 아직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

관심있는 분들은 꼭 1844년 책을 읽어 보기 바란다.

소외 하면 따돌림, 배척 같은 말을 연상할 거다. 마르크스는 그런 뜻으로 사용한 건 아니다.

물론 마르크스 전에 헤겔이나 포이어바흐도 소외 개념을 썼다. 이들의 개념은 쉽게 말해 "통제력을 잃어 버리는 것"을 뜻한다. 인간이 외부세계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 버린 것을 뜻하는 말로 '소외'를 사용했다.

헤겔은 그 원인을 인간 정신, 요즘 말로 심리에서 찾았고, 포이어바흐는 종교에서 찾았다. 이에 반해 마르크스는 소외의 원인을 물질적 근원, 사회의 구조에서 찾았다.

인간의 노동이 마르크스의 개념에서 핵심을 이룬다.

인간은 자연에 대해 협력적으로 노동하며 자신을 부양할 생산물을 만든다. 처음에 인간 사회는 협력적이었다. 열에서 열다섯 무리가 채집을 하며 집단 생산을 하고 공동 소비를 하며 살았다. 이것이 원시 공산주의다. 원시 공산주의 사회가 인류사의 99%다. 계급사회는 인류사의 1%에 불과하다.

계급 사회가 되면서 인간은 통제력을 잃었다. 계급의 소수가 생산물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초기엔 이런 일이 분업이란 필요로 용인됐다. 그러나 나중엔 억압적 지배가 됐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노동생산물을 일부 빼앗기고 노동에 대한 간섭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시작되기 전엔 이런 통제가 본격적이고 체계적이지는 않았다. 자본주의에서 본격적 체계적으로 노동 소외가 시작된다.

보통 사람들은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면서 동시에 생산수단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 마르크스는 이를 "이중의 자유"라고 불렀다.

먹고 살려면 생산수단에 접근해야 했고 자본가가 내놓는 조건에 굴복해야 한다. 자본가 뜻에 따라 해고 당하고.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지시에 따라 일해야 했다.

세계적으로 보면 시장이라는 무질서가 있다. 그러나 공장 차원에선 전제가 지배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자를 임금노예라고 불렀다.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게 예속당한다.

네 가지 노동 소외

첫째, 생산과정에서 소외된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생산과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본가와 그 마름이 계획해 놓은 대로 일해야 한다. 분업이 촘촘해서 누가 무슨 일으 하는지 습득을 못할 정도다.

이걸 잘 보여 주는 사례가,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다. 채플린의 작품이 대부분 좋지만 이건 특히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주인공이 공장 노동자인데 완전 기계의 일부로 움직인다. 기계에 짓눌린 삶을 산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근로민중의 대부분은 농민이나 수공업자였다. 이들은 생산물을 빼앗기긴 했어도 자기 땅, 자기 공구를 갖고 있었고 자기 방식으로 일했다. 노동에 대한 자기통제력이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선 그걸 빼앗겼다. 노동은 고역이 됐다. 3D업종만 그런 게 아니다. 노동자들의 일 자체가 다 그렇게 됐다.

특히 콜 센터 같은 데를 보라. 얼마나 단조로운가. 사무직도 지금은 꼼꼼히 타자 몇 개 복사 몇 장 이런 수준까지 감시당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노동과정에서 소외당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잠좀 자자며 파업하고 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잠도 못자게 노동과정을 틀어 쥔 거다.

《전태일 평전》의 일기를 보면, 전태일이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일을 하는 건지 내가 쓰고 있는 모자와 삽이 일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써 있다. 소외에 대해 아주 잘 표현한 말이다.

노동자들이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게 기후변화를 부르고 그게 재앙을 부른다는 걸 알고,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말자고 결정해도 절대 자본가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석유산업은 가장 수익성 높은 산업이다. 그리고 화석연료가 현대 자본주의 산업에 지배적이다. 그래서 경쟁을 하려면 그걸 써야한다. 만약 어떤 착한 자본가가 기후변화를 위해 재생에너지를 쓴다고 결정한다면 그 기업은 망할 거다.

둘째는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다. 생산물은 노동자가 만든 건데 노동자가 통제하지 못한다. 세상의 사물들을 누가 만드나. 전부는 아니라도 노동자가 대부분을 만든다. 세계 1/3을 차지하는 노동계급이 압도 다수의 결과물을 만든다.

그런데 한 쪽에선 식료품을 버리고 한 쪽에선 만든다. 노동자들은 자기들이 살지도 못할 집을 짓고 타지도 못할 고급 자동차를 만든다.

옷도 명품 옷은 물론이고 괜찮은 옷도 노동자들은 입지 못한다.

더 두드러진 걸 보자. 노동자들은 핵무기를 만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걸 만들면 각국의 노동자들이 (자본가도 죽이지만) 상대편 노동자를 죽이게 된다. 그런데 이런 무기를 만드는 거다.

핵발전소 사고도 그렇다. 일본에서 핵발전 사고가 났다. 이 사건 이래 1만 명이 자살했고, 더 많은 이들이 서쪽으로 이사했다. 적잖은 이들이 해외로 이사를 했다. 노동자들이 이걸 원하겠는가? [그러나 노동자들은 핵발전소를 만들어야 하는 처지다.]

한국 역시 핵 위험에 노출돼 있을 거다. 지배자들이 숨기고 있겠지만.

셋째, 같은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다.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지배하며 노동자들의 소외에서 이익을 본다.

노동자는 노동이 고역이고 월요일을 싫어 한다. 월요일 월요일밤에 란 노래 따윈 없다. TGI Friday지 Monday가 아니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소외된 관계다.

무넛보다 노동자들 간의 소외가 있다. 아주 칸막이화돼 있다. 본체를 만드는 노동자와 바퀴 고무, 바퀴 휠 캡을 만드는 노동자들은 서로 인적인 연관이 없다. 시장에서 화폐로 만날 뿐이다. 자본가들은 사업체끼리 경쟁을 하므로 노동자들도 경쟁에 휩싸인다. 노동자는 노동 시장을 두고서도 경쟁한다. 학벌, 성적, 신체조건, 용모 등이 바로 그것이다. 때문에 노동자들 사이가 이간된다.

한 사람이 노동자들을 조직해 파업을 해서 정리해고를 막았다. 그런데 정리해고는 막았는데 파업을 주도한 15명만 해고를 당했다. 회사가 14명을 불렀다. 가장 주도적이었던 한 사람만 해고를 시키면 너희는 봐 주겠다고 했다. 나머지 14명이 한 사람을 꽁꽁 묶어서 무력화했다. 그 중에는 이 사람의 15년지기도 했었다. 이 사람이 재판을 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가, 사장이 내 친구를 그렇게 만들었다" 고 울먹이며 말했다.

이렇게 노동자 사이를 이간하는 거다.

마르크스는 여기에 또 하나 물신 숭배를 첨가했다. 자본론에 나온 이야기다. 간단히 말해 생산과정 속 인간들의 관계가 사물을 매개로 한 관계로 나타난다. 쉽게 말해 세상이 돈 놓고 돈 먹기처럼 보인다는 거다. 실제는 노동자를 통해 생산을 하는 건데 돈 놓고 돈 먹는 과정만 보이게 되는 거다. 그래서 사람들이 화폐를 숭배하게 되는 거다.

그 결과 인간의 관계가 사물의 관계처럼 된다. 몇 점쩌리 신랑신부감이다 하는 게 일상화된다. 쟤는 나랑 연애하기엔 쨉이 안 되고 하는 등등의 이야기가 그 결과다.

남들을 보는 것도 완전히 수단으로 본다. 돈으 벌거나 편하게 해 줄 수단으로 말이다. 인간이 인간을 수단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물신숭배가 소외를 조장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루카치는 이를 사물화라고 표현했다.

네 번째 측면은 인간 본성으로부터의 소외다.

본성이 뭐냐? 많은 이들은 오해를 한다. 사회에 따라 달라지는 걸 고정불변인 양 말한다. 인간은 이기적이라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는 게 대표적 오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고정불변의 인간본성은 없다고 말하긴 한다.

그러나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른 게 있는가 하면 변하지 않는 측면도 있다. 의식주와 성욕은 변하지 않는다. 또 하나 마르크스가 말한 본성은 "협동해서 자연에 작용을 가해 생산물을 얻어낸다" 하는 점이다.

특히 협동을 할 때 토론하고 계획을 세워 자연에 작용을 가하는 것이 인간의 불변 특징이다.

자본주의에서도 전 사회적으로 보면 협동이 이뤄지고 있는 거다. 자동차만 봐도 인도네시아에서 고무를 만드는 노동자와 한국의 휠캡을 만드는 노동자들은 서로 거미줄처럼 연결돼 협력하고 있는 거다. 그걸 잘게잘게 체제가 쪼개 놓는 거다.

협동적 측면이 계급사회 들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전자본주의 사회는 가족 단위에서 협동 노동을 했다. 분업이 심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 들어서면 협력뿐 아니라 경쟁도 강요된다. 앞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그렇다. 인간 본성에 경쟁이란 놈이 끼어들어 협동을 왜곡하고 뒤틀리게 만드는 거다.

협동의 기초가 되는 공감 능력도 왜곡된다. 사람들이 차도남 차도녀로 변해 간다. 이걸 끝까지 몰고 가면 사이코패스가 되는 거다. 사이코패스가 다 연쇄살인마인 건 아니다. 일부만이다. 연쇄살인마가 다 사이코패스인 것도 아니고. 남의 고통에 공감 못하는 거다. 저본주의가 한껏 발달하기 시작한 19세기 말부터 연쇄살인마가 출현했다.

체제 때문에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거다. 그런 상황이 노동의 소외에서 비롯하는 거다.

노동의 소외 때문에 사회 전체적으로 소외가 발달하는 상황이 생긴다. 노동자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이 소외에 연루된다.

자본가도 마찬가지인데, 자본가는 소외에서 이익과 쾌락을 얻기 때문에 자본가도 소외된다고 하면 추상적이다.

외부 세계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결과 사람들은 엄청 불안해 한다. 박노해가 정치는 별로지만, 시는 괜찮은 게 많은데 그의 시 중 "나는 ET가 되어 거리를 헤맨다" 라는 구절이 있다. 외부 세계가 낯설게 느껴지고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세계에 내 편은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에 휩싸인다.

노동은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지고 나아가 세상 일이 다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허무감이 밀려 온다. 자신은 공장 기계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실존철학이 나왔다. 카프카의 작품이나 심판(제대로 번역하면 재판) 같은 작품이 그렇다. 또 사르트르 등은 이를 이론화하려고 했다.

잠깐만 옆길로 가면, 사르트르, 카프카, 까뮈는 스탈린주의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다. 까뮈는 좌파였다가 나중에 전향했다. 공산당은 이를 집어내서 소외를 다루면 좌절하고 전향하게 된다고 악선동했다.

다시 원래 논의로 돌아가자. 소외의 징후를 더 보자.

사람들 사이가 소원해지고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낀다. 고등학생들이 이제 다른 세계 겠거니 하고 대학에 왔다가 기대와 다른 대형 강의와 시험을 보고 난 왜 외로울까 이렇게 간다. 외부세계가 낯서니 스트레스가 많다. 심장병 등도 근원을 따져 보면 소외가 있다. 아동학대 가정폭력도 소외와 관련돼 있다. 왕따도 소외에서 생긴다. 억압과 경쟁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를 속죄양 삼아 집단으로 따돌리는 것인데, 소외를 보상 받으려는 게 삐뚤게 나거는 것이다. 마약, 알콜중독, 인터넷 중독, 댓글 폐인, 종교 몰입, 등이 모두 소외의 결과다.

대학생의 조건을 단지 경제적으로만 볼 게 아니다. 대학생의 조건을 규정하는 것도 소외다.

핵전쟁의 위협. 핵으로 죽고 싶지 않다. 그런데 핵전쟁의 위험도 자본주의의 소외에서 비롯한다.

사람들이 왜 개량주의적으로 생각할까. 집단으로 뭉쳐서 확 뒤엎으면 될 텐데. 수백만이 파업을 하고 그래서 경찰과 군대를 동요하게 만들고 세상이 다 자기 것인 것 처럼 노동계급의 힘을 보여 주면 될 텐데 왜 사람들은 세상이 점진적 개혁만 가능하다고 믿을까.

이건 지도부만 문제인 게 아니다. 대중 자신이 세상을 우리가 통제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과 거기에서 오는 느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노동자의 세상? 말도 안 돼'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도 소외에서 비롯한다.

결론

소외를 여가, 오락, 종교에 몰입하고 라이프스타일을 바꾼다고 해결할 수 있을까? 가족을 신성시한다고 해결할 수 있을까?

소외로 인한 현상들이 자본주의의 소외로부터 비롯했다. 체제의 핵심 특징이기 때문에 그런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고 이윤이 아니라 완전히 인간의 필요에 따라 생산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사회가 되야 소외가 없어질 수 있다.

이를 위한 운동이 시작될 때 소외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 지를 힐끗 볼 수 있다.

노동자들 수백만이 모여 행동할 때, 타흐리르나 스페인 광장 같은데서, 무엇보다도 공장 콜센터나 광산 같은 데를 노동자들이 장악했을 때, 세상을 우리가 뒤흔들 수 있을 때 소외를 극복한다고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작은 규모라도 다함께 같은 데서 연대 활동을 할 때 인간을 갈라놓는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지 힐끗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독자 2011.07.24 17:55

    아마 잭 더 리퍼 사건을 염두에 두신 듯한데, 19세기 말에 연쇄살인마가 처음 출현한 게 아니라 대중 매체의 발달 때문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겁니다.

    연쇄살인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늘 존재해 왔습니다. 연쇄살인의 형태가 시대의 영향을 받고 변화되는 것은 맞으나 연쇄살인 자체가 근대에 갑자기 출현한 것은 아닙니다.

  • 독자 2011.07.25 15:49

    저도 전문가는 아닌지라 감히 강하게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딱히 명저는 없지만, 해럴드 셰터의 <연쇄살인범 파일>에서 살인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파트나 로버트 헤어의 <진단명 사이코패스> 정도가 무난할 것 같습니다. 전자는 약간 흥미성 위주의 저술이고, 후자는 우파적 입장에다 에피소드 위주의 서술이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읽어야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대개 좌파들이 이런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는지라 뭐 어쩔 수 없군요.

    제가 기억하기로 존 몰리뉴가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자에서 사회주의가 실현되어도 원한이나 치정에 의한 범죄는 남아있을 수 있다... 라고 했던 걸로 압니다. 물론 사회주의가 경제문제가 아닌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일 거라고 했지만요. 연쇄살인의 경우도 사이코패시나 정신분열 같은 생물학적 원인이 많이 작용하기 때문에, 사회 체제만 바꾼다고 해서 저절로 사라진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뭐,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덧붙입립니다만, 자본주의 체제가 연쇄살인 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을 無에서 有로 만든다는 게 아니라 발생 확률을 높이는 촉매제 구실을 한다는 거죠. 본문의 말씀대로 '소외'가 거기에 큰 몫을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