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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회/토론회 후기

[한국사회포럼]격동의 이집트:중동의 민중반란과 연속혁명 (2)레프트21 발행인 김인식 발제

2011년 2월 19일에 열린 한국 사회포럼 중 다함께가 주관한 토론회를 필기한 것입니다. 받아 적은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총 네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1)이집트인 마흐무드 압둘 가파르의 발제

(2)레프트21 발행인 김인식의 발제

(3)자유토론에서 나온 발언 중 좋은 발언 : 다함께 운영위원 최일붕의 발언

(4)정리발언

<레프트21> 발행인 김인식

이집트 민중에게 축하와 연대의 인사를 보낸다. 이집트 민중에게 혁명적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바란다.

△레프트21 발행인 김인식

혁명의 시대

2011년에 혁명이 돌아왔다. 21세기에 일어난 혁명이다. 21세기에 혁명이 가능할뿐 아니라 현실성이 있다는 점을 북부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의 민중들이 보여 주고 있다. 부하지지가 분신한 후 벤 알리 타도에 한 달 걸렸다. 벤 알리보다 강한 무바라크 타도에 2주 반이 걸렸다. 이집트 혁명은 이미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 됐다. 이집트, 튀니지 민중은 역사책에서나 본 혁명적 소용돌이를 지금의 현실로 보여 줬다. 혁명적 소용돌이의 해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매일 나오는 뉴스들, 이집트 혁명이 어떻게 번지고 있는지를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트로츠키는 10월 혁명 이후 레닌이 "사태가 빨리 진행돼 현기증 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지금 우리가 바로 그렇다. 혁명의 속도, 확산 속도 모두 빠르다. 리비아와 바레인에서 격렬한 반정부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지난 18일 동안 이집트에서 진행된 운동은 초점은 무바라크 제거였다. 그가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 가파르가 잘 말했다. 30년 간 야만적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로 만들었다. IMF조차 예상을 뛰어넘는 시장개방이라고 했다.

무바라크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외교 정책을 충실히 따랐다. 물론 이집트의 친미, 친이스라엘 정책은 사다트 정권부터 시작된 거다. 하지만 무바라크는 이를 가속화했다. 무바라크가 미국과 이스라엘 지지한 10년 간 이스라엘은 알 아크사에서 시작된 인티파다를 탄압했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팔레스타인의 마무드 압바스 정권은 이스라엘에 완벽히 양보할 태세가 돼 있는데도 이스라엘은 일절 협상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데도 무바라크 정권은 이스라엘과 긴밀한 우호 관계다. 그 기간에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하고 이스라엘의 레바논 전쟁을 지원했다.

즉, 이스라엘의 대 아랍 공격을 무바라크는 지지해 왔던 것이다.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아랍 세계 전역의 분노가 커져 왔는데 말이다.

가파르가 아까 "친절한 사람이 화나면 조심하라"고 했다. 트로츠키는 이를 "혁명적 보수성"이라고 한 바 있다. 노동 대중이 현 상황을 지키다 지키다 안 됐을 때 터져 나오는 게 혁명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싸우지 않는 것을 좌절할 거 없다. 혁명을 예비하고 축적하는 과정인 거다. 그걸 우리는 오늘날 북부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본 거다.

이집트에는 카파야 운동이 있었다. "이제 그만" 이라는 뜻인데, 민주화 운동이었다. 2008년에는 마할라 지역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이런 분노가 커지고 투쟁 일어나자 무바라크가 한 일은 모든 독재자들과 비슷한 것이었다. 억압과 탄압을 강화했다. 선거를 방해하고 반대파를 수감, 고문했다. 무바라크 정권은 반대파의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이다.

이집트인의 3분의 2가 서른살 미만. 매우 젊은 나라다. 아랍 세계와 이란 인구가 4억 2천만인데 3분의 2가 30세 미만이다.(연사는 20세 미만이라고 말했는데, 실수인 듯하다.) 5분의 1이 15~25세다.

서른 살 미만이 인구에서 3분의 2를 차지한다는 건 압도 다수가 삶 전체를 무바라크 치하에서 보냈다는 거다. 살아오는 내내 야만적 신자유주의 공격 받은 거다.

그리고 이번 혁명은 바로 이들이 터져 나온 거다. 타흐리르 광장이 젊은이들로 가득찼다는 것은 이들의 분노를 보여 준다.

즉, 노골적 계급 통치의 직접 결과물이 혁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집트 혁명은 반독재 반제국주의 반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성격을 띄는 것이기도 하다. 자주 계열은 이집트 혁명을 반미자주 혁명이라고 하는데 이런 규정은 혁명의 일부만 설명하는 거다. 어떤 면에서는 아전인수기도 하다. 혁명을 자신들 이론에 끼워 맞추는 거다. 이집트 혁명은 더 다양한 측면에서 봐야 한다.

30년 독재자인 무바라크가 물러났다. 중요한 것은 그를 몰아낸 게 군대나 정치인, 외국군이 아니었다는 거다. 민중이 독재자를 타도했다는 게 중요하다. 바로 이들이 카이로를 점거했고, 주요 도시를 점거하고 행진하고 파업했던 거다. 이 과정을 통해 가장 야만적인 독재자 중 하나를 몰아낸 거다.

무바라크 쫓아낸 다음 축하의 물결이 넘치고 있다. 혁명은 피억압자들의 축제라고 레닌 말했다.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 방송들이 보여 주고 있다. 독재자를 몰아낸 후의 희열을 볼 수 있다. 타흐리르 광장은 혁명의 상징이 됐다.

이집트 혁명은 세속적 민주주의 전통에 입각했다. 서방은 중동 민중이 종교나 민족주의에 의해서만 동원된다고 말해 왔다. 사실이 아니었다. 오늘 못 온 연사인 칼리드 알리는 얼마 전 있었던 토론회에서 타흐리르 광장의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단결한 것을 말한 바 있다. 무슬림들은 하루 다섯 번 기도한다. 그들이 기도하려 하자 전투경찰이 진압을 시도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을 애워 싸고 보호했다. 이집트 혁명이 세속적 민주주의 전통에 기반했기 때문에 종교를 넘어 단결이 가능했던 것이다.

미국은 급진적 이슬람주의 정권 등장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국이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계속 지지해 왔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는 급진 이슬람의 핵심국가다. 따라서 미국이 이슬람주의 정권을 걱정한다고 하는 것의 이면에 있는 진정한 두려움은 바로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거스르는 정권이 등장하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를 종교 문제인 것처럼 말하지만 진실은 이것이다.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민중은 여전히 투쟁중이다. 속은 후련하지만 아직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이집트 노동자들도 있다. 이들은 경제적 정의, 진정한 자유, 친미 외교 폐기를 요구하고 있다. 무바라크의 몰락이 이집트 사회에 희열을 안겨 줬지만 이 부분 때문에 다음이 무엇인지를 두고 정치적 분화도 시작되고 있다.

무바라크가 퇴진했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여전히 무바라크 정권의 사람들은 남아있다. 또한 국가의 핵심인 억압기구는 살아남았다. 물론 보안군은 1월 28일 거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사라졌다. 그러나 군대는 남아있다.

지난 주 금요일 무바라크 퇴진 직전 군대는 무바라크에게 사임 압력을 넣었다. 군 장성들이 사임 압력을 넣은 것은 군대를 보존하기 위한 정책이었던 것이다. 장군들은 하급 장교들과 사병들이 시위대에 동조하고 자신들에 대한 충성심을 버릴까 봐 걱정했을 것이다. 하급 장교과 병사의 상당수가 시위대에 우호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언론은 하급 장교들이 시위대와 손잡는 장면 같은 것을 보도했다. 무바라크는 퇴진하기 이틀 전에 9월까지 버틴다고 했다. 그러나 장성들은 그렇게 하면 군대 내 반란이 있을지 모른다고 걱정한 거다.

79년에 이란에서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당시 팔레비 왕정에 반대해 여러 달 동안 시위와 파업이 있었다. 왕정은 이를 잔인하게 진압했다. 여러 달 동안 이 과정 지속하면서 군부 내 결속력 떨어지고 이반이 시작됐다. 결국 팔레비만 쫓겨난 게 아니라 왕정 체제 자체가 붕괴했다. 무바라크가 9월까지 버티겠다고 했을 때 미국과 이집트 군부는 이란 혁명을 떠올렸을 것이다. 미국과 이집트 군부는 그래서 무바라크를 무자비하게 낙마시킨 거다.

1789년 루이 16세 또한 끝까지 버티다가 왕정 자체가 날아갔다. 1917년 2월 러시아 니콜라이도 끝까지 버티다가 아예 짜르 체제가 날아갔다. 이런 역사적 경험을 지배계급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선수 치려고 노력한 거다.

군부를 믿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등장한 게 군사최고 위원회다. 이 기구는 일종의 혁명 평의회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혁명 평의회는 1952년 나세르와 자유 장교단이 왕정 타도 후에 만든 거다. 일종의 군사정권이다.

문제는 최고 수장인 탄타이가 나세르는 아니라는 것이다. 위키릭스의 폭로를 보면, 장교들이 탄타이를 무바라크의 딸랑이라고 묘사한 게 있다. 탄타이는 그 만큼 신뢰를 못 얻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최고 위원회의 등장과 활동은 군부가 현 상황을 유지하는 데 필사적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대다수 시위대는 한동안 군대를 신뢰할 태세가 돼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군대가 보안군과 다르다고 인식한다. 일종의 혁명 보호자로 본다는 거다. 타흐리르 광장을 보면 군인과 함께 탱크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려고 줄 서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물론 경계심은 있다. 이 자리에 오지 못한 연사인 칼리드 알리는 군사 정권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은 민간 정권으로 이양하기를 바란다. 분명히 불안감도 공존하는 거다.

그러나 군사최고 위원회는 아직 선거 일정도 공지하지 않고 있으며 계엄도 풀지 않고 있다.

물론 군대 내에서 균열 조짐 있다. 큰 압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무바라크의 장군들이 여전히 군사최고위원회에 포진해 있다. 이들이 이집트를 민주사회로 이양해 줄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군부는 독재의 척추였고 엄청난 특혜를 받았다. 군부는 민간 경제 활동의 대주주기도 하다. 군부가 운영하거나 군부에 봉사하는 기업도 많다. 한 마디로 이집트는 군부와 민간이 공존하는 경제다. 중국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현 상황 유지에 군부는 이해관계가 있다.

또한 군부는 매년 미국에 13억 달러를 지원받아 왔다. 이런 군부가 미국을 거스를 것인지 의심해야 한다.

이집트 혁명은 국제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이란에도 저항이 상륙해 있다. 이란의 저항에 대한 미국과 서방의 반응은 위선적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이란 시위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집트 시위대를 따르라. 당신들의 용기와 포부를 지지한다" 하고 말했다. 그런데 반란이 이란에서만 난 건 아니다. 핵심 친미국가인 바레인,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위가 있었다. 그런데 이 시위에 대해 미국 정부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지지도 아닌 거다.

미국은 이란의 운동이 친미 운동으로 나가길 원하는 거다. 우크라이나나 레바논에서 미국이 지원한 '색깔혁명'이 되길 바라는 거다. 미국과 서방의 지도자들이 시위에 동조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자나깨나 중동에 미국의 전략적 이해가 관철되는 게 최우선이다. 민중의 자유는 이들 계획에 없다.

물론 이란 민중은 미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바로 30년 전 민중이 스스로 타도한 팔레비가 대표적 친미였다. 이란 민중들은 팔레비를 미국이 지원한 것을 알고 있다. 이란 운동은 반독재 운동인 동시에 반제 운동으로 나갈 가능성 있다. 특히 중동 운동들은 반제 반독재 반자본주의적으로 나가야 한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 이게 바로 이집트 혁명이 보여 준 거다.

노동계급의 구실

주류 언론들이 그다지 부각하지 않는 중요한 사실 있다. 노동계급의 구실이다.

군부가 지난 주 금요일 무바라크 사임 압력을 넣기 전 바로 이틀 전부터 대중파업이 분출했다. 군부는 그 점 때문에 무바라크 사임 압력을 넣은 거다. 체제 자체가 위험해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군부는 호리병 밖으로 나온 지니를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집트 대중은 며칠 전 강력한 독재자를 타도했고 고무돼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집트 혁명에는 모든 계급이 참여했다. 무바라크가 거의 모든 계급에게 왕따당했기 때문이다. 타흐리르 광장에는 상류층 엘리트의 아들딸들이 나와서 도시빈민이나 노동자들과 손잡고 무바라크 타도를 외쳤다. 러시아 니콜라스 2세가 타도되기 전에도 러시아 부르주아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이집트도 마찬가지였던 거다. 그러나 이 정권이 결정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대중파업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이런 대중파업은 어느날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지난 3~4년 간 1946년 이래 이집트에서 가장 큰 파업운동이 있었다. 이 운동은 마할라 시 방직공장에서 시작됐다. 지난 3년 간 하루도 파업 없었던 날이 없다고 한다.

87년 6월 항쟁도 갑자기 난 게 아니다. 80년대 초반부터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됐다. 84년 택시 파업, 85년 구로 동맹 파업 등 노동자 파업도 있었다. 그게 축적되면서 87년 항쟁이 일어난 거다. 이집트도 마찬가지로 누적된 운동 있었다. 그리고 그 운동은 성격상 경제적인 동시에 정치적이었다. 국가가 파업을 강력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고 경찰에 맞서 화염병 던지며 싸워야 했다. 노동자들의 파업 요구안에는 무바라크 퇴진이 포함돼 있었다.

한국에서도 미래의 혁명을 위해 오늘의 투쟁을 누적시켜야 한다. 한 노조 활동가가 이런 말을 했다. "이집트 노동자들 대단하다" 이 말에는 한 때 자신도 그렇게 싸웠다는 생각도 있을 것이고, 우리도 언젠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당장 혁명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일의 혁명을 위해 오늘의 투쟁을 누적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집트 혁명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한국의 투사들과 토론하고 과제를 도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1월 25일 반란 첫 날부터 노동자들은 시위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냥 시위대로 참가했다. 아직은 독집적, 집단적으로 참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시위대가 아니라 정부가 경제를 중단시켰다. 일종의 자본가 파업을 무바라크가 일으킨 거다. 이집트인들의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2월 8일에 무바라크가 9월까지 남겠다고 했다. 이집트를 정상으로 되돌려놓겠다고 한 거다. 그 때부터 노동자 파업이 시작됐다. 노동자들은 광장에서 작업장으로 돌아가서 토론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파업할 때다 하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 때부터 노동자들은 독립적, 집단적으로 움직였다. 많은 경우 노동자들은 혁명에 연대해 정치적 요구를 채택했다. 특히 수에즈 운하와 텔레콤 이집트 노동자들이 중요했다. 바로 이들의 파업이 소규모 작업장의 노동쟁의를 고무했다. 부패한 이집트 노동 연맹을 탈퇴하고 독립 노조를 설립할 권리가 중요한 요구사항으로 제출돼 있다.

현재 무바라크는 물러났지만 거의 모든 경제 부문에서 파업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경찰도 파업한다고 한다. 혁명 분쇄 역할을 맡았던 그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제출하며 파업에 올라탈 정도로 파업 열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파업이 혁명의 모멘텀을 밀어붙이고 실현할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요구가 정치적 요구를 둘러싼 투쟁을 강화할 수 있다. 독일 혁명가 로자룩셈부르크가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보면서 분석한 경제와 정치의 상호작용이 이집트에서 일어나고 있다. 정치적 승리가 경제적 요구를 고무하는 것이다. 무바라크 타도 혁명의 첫 불만은 경제 상황으로 인한 것이었다. 무바라크가 퇴진했지만 이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만약 이 부분에서 성공을 거두면 정권 전체를 제거하는 운동을 강화할 수 있다. 따라서 이집트 좌파는 공장으로 가야 한다. 광장에 남아있는 게 아니라 공장으로 가서 거기 있는 노동자들을 설득해야 한다.

혁명이 진척되면 계급 양극화는 필연적이다. 이집트 노동계급은 이집트뿐 아니라 중동 전체 해방의 열쇠를 쥐고 있다. 연속 혁명으로 나가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자본에 반대하는 경제적 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 운동이 국가 탄압과 정면으로 마주치면 다시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집트 좌파는 이걸 촉진해야 한다. 이 부분의 성공 여부가 중요하다. 현재는 군부가 권력을 쥐고 있다. 사회 혁명으로 전환이 안 되면 군부는 피의 보복, 반혁명을 할 가능성이 있다.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성공했지만 7월에 꼬르닐로프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칠레에도 거대한 운동이 있었지만 군부 반동을 준비했고 결국 73년 9월에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집트 군대도 예외가 아닐 수 있다. 노동자들이 자본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나가는 문제는 정치 혁명의 성과 보존과도 관련있다.

혁명의 본질에는 대중의 엄청난 자긍심이 있다. 이는 대중이 자주적으로 자치조직을 건설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바로 광장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광장의 자치 능력이 작업장과 지역사회에서도 실현돼야 한다. 작업장위원회, 지역위원회, 파업위원회의 전국적 네트워크를 건설해야 한다. 이는 이집트 혁명의 성과를 보존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이다.

혁명의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 운동 내에서도 분열이 있다. 그러나 지배계급 사이에서도 진로를 놓고 분열이 있다. 누가 단호하게 혁명의 미래를 설득하느냐에 이집트 혁명의 미래가 달려 있다. 이 혁명 속에서 이집트 사회주의 좌파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운동을 발전시킬 기회를 잡아야 한다.

이집트는 최초의 계급사회가 등장한 곳이다. 이제는 이집트가 계급을 없애는 여정으로 나가고 있다. 이게 가능하기 바란다.

이집트 혁명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