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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회/토론회 후기

마르크스주의 오늘의 의미 ㅡ 맑시즘 2011 폐막 강연, 알렉스 캘리니코스

맑시즘 2011 폐막 강연을 아이폰으로 필기해 올린다. 현재 청중토론이 진행중이다. → 나중에 컴으로 수정을 봤다.

△폐막 강연을 듣고 있는 청중들

마르크스주의 오늘의 의미

몇 가지 측면으로 오늘의 의미를 살펴 보겠다.

첫째,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을 짚는다. 아주 중요하다. 자본주의 위기 이론과 후대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은 경제 위기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틀을 제공한다.

이는 오늘날을 분석하는 데 중요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경제 위기는 멍청한 정치인, 탐욕적 자본가, 멍청한 정책 때문이 아니다. 물론 멍청한 정치인과 탐욕적 자본가가 넘쳐나긴 하지만 그들 때문에 경제 위기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람시와 유기적 위기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 그람시는 유기적 위기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중요한 기여를 했다.

유기적 위기는 3-4년 주기로 늘 있어왔던 일상적 위기가 아니다. 유기적 위기는 자본주의에 내재된 근원적 모순을 노출하며, 자본주의 틀 내에서 해결하기 매우 힘든 위기를 말한다. 이건 뿌리깊고 오래 간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위기다.

미국의 좌파 경제학자 크루그먼은 오늘의 위기를 제 3차 대공황이라고 했다. 오늘날의 위기를 19세기 말, 대공황과 비교하는 거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심했던 30년대 대공황과도 비교하는 거다.

그람시가 유기적 위기란 개념을 개발한 건, 30년대 대공황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그래서 그람시의 사상이 오늘날 더 의미있는 거다.

유기적 위기에 대해 하나만 더 말하겠다. 어떤 이들은 "위기가 끝났다, 중국의 고성장을 보라, 중국은 심지어 한국 같은 주변 국가들의 경제 성장률을 끌어올리고 있다" 하고 맡한다.

하지만 유기적 위기를 포함해 경제 위기는 늘 불균등하다. 그래서 30년대에도 일본을 포함해 몇몇 주변부 국가는 상당히 고성장했다.

따라서 체제 특정 지역 경제가 잘 나간다고 해서 가장 주요한 북미와 유럽의 경제가 침체라는 사실을 가릴 순 없다. 중국의 고성장이 언제까지 가능할지도 알 수 없다.

두 번째 측면은, 정치 이론으로서 의미다. 이렇게 말하면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다. 맑스주의가 경제 환원론이라고 보는 관점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맑스주의가 경제 이론으로는 쓸모 있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맑스주의 이론에서 정치 이론은 핵심이다. 그래서 가장 위대한 맑스주의자인 맑스, 레닌, 트로츠키, 그람시 등을 보면 자신이 직면한 중요한 정치 문제를 분석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맑스는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중요한 분석을 했다. 토대는 기초가 되는 경제, 상부구조는 토대를 기초로 나타나는 정치, 법률 등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상부구조를 무시하곤 했다.

이는 잘못된 관점이다.  맑스 자신이 말했듯 상부구조는 계급이 계급의식에 눈뜨며 투쟁하게 되는 정치, 법률, 이데올로기의 장이다.

비록 계급 갈등으로 이어지는 경제 위기는 토대에서 일어나지만 그 모순이 어디로 나가느냐는 상부구조의 투쟁으로 결정된다.

그람시는 이를 말만 달리해 설명한다. 경제 위기는 이를 해결하려는 투쟁을 발생시킨다고 했다. 해결책은 정해져 있지 않다.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에 승리해 그람시도 옥고를 치렀다.

오늘날 경험하고 있는 것도 경제 위기 해결책을 둘러싼 사회세력 간의 갈등이다. 한 편에선 노동계급에 맞선 지배계급의 공세가 있다. 현재 이 투쟁은 유럽에서 가장 앞서 있고 미국도 따라 가고 있다. 

지금 지배계급의 공세는 본질적으로 체제를 안정화하기 위해 이미 사용한 것보다 더 많은 신자유주의 약을 투여하는 것이다. 물론 이건 미친 짓이다. 애초 위기 발생에 일조한 것이 신자유주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공세가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는 거다. 긴축에 맞선 유럽 노동자 학생 투쟁, 아랍 혁명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대목에서 세 번째 의미를 살필 필요가 있다. 계급투쟁으로서 갖는 의미다.

맑스주의자들이 보기엔 오늘날 사회를 결정짓는 결정적 요인은 노동과 자본의 계급 투쟁이다. 임금노동에 대한 착취야말로 현대 자본주의에서 직접 생산자로부터 잉여가치가 추출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적대가 늘 선명한 건 아니다. 계급투쟁이 보통 은폐되거나 전이돼 있기 때문이다.

때론 이런 갈등을 명확히 의식하는 게 오히려 자본가들일 때도 있다. 신자유주의란 것도 근본적으론 자본가들이 명확하게 계급의식적으로 추구한 계급전쟁이었다. 신자유주의는 착취율을 증가시켜 수익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자본가계급의 프로젝트였다.

흥미롭게도 급진좌파의 상당수가 자본가들보다 계급투쟁을 덜 명확하게 포착한다. 심지어 노동계급이 하나의 사회세력으로서는 사라지고있다고까지 주장한다. 불안정 노동, 비공식 노동이 등장하며 노동계급이 해체됐다고 하는 거다. 토니 네그리나 마이클 하트에 따르면 노동계급은 끝났고 다중이란 세력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했다고 한다.

첫 번째 반론은, 그들이 말하는 노동형태 대부분은 새로울 게 없는 현상이라는 거다. 맑스의 자본론을 읽어 보면 임금노동이 어째서 현대 자본주의에서 착취를 이뤄내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근데 그뿐 아니라 맑스의 분석을 보면 19세기 영국에서 안정적 임금노동과 함께 대량 실업, 불안정 노동도 공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점에서 21세기 자본주의는 19세기 자본주의로 회귀한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세기에 안정적 노동과 불안정 노동이 공존했지만 전투적 노동운동이 등장할 수 있었다. 19세기 노동운동이 성취한 것 중 하나도 불안정/비공식 노동자들을 조직해 안정된 노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례는 영국의 항만 노동자 사례다. 이들은 고전적 불안정 노동자이며 고전적인 전투적 노동운동의 주체였다.

내가 비판하는 분들은 때로 이런 주장을 한다. "안정 노동과 불안정 노동 사이엔 이해관계 충돌이 있다."

토니 네그리는 잘 조직된 조직노동자들을 쿨락이라고 불렀다. 쿨락은 러시아의 부농을 말한다. 이건 웃기는 소리다. 이 주장의 함의는 고임금 조직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들의 불안정 저임금 노동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불안정 노동에서 이득을 본다는 거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다. 고용도 불안정하고 임금도 적게 받는 노동자들이 많아질수록 고임금 조직 노동자를 공격하기 쉽다. 사장들은 이를 잘 이해하고 있다. 저들이 노동시장 유연화를 말할 때는 모든 노동자를 불안정 노동자로 만들겠다는 거다. 그래서 노동자 모두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 모든 노동자들의 안정적 고용 조건과 고임금을 쟁취하는 것은 고임금 조직 노동자들에게도 이익이다.

왜 임금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서 그토록 중요한지 이해해야 한다. 노동계급은 착취당한다. 이렇게만 말하면 노동자들이 불쌍해 보인다. 착취당하는 사실만으로 안 좋은 건 맞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선 착취당하지 않는 게 가장 불행하다. 착취당하는 자들은 자본가들의 이윤에 기여한다. 자본가들은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맞서 싸울 때 노동자들은 힘을 갖는다.

반면 착취와 피착취 관계의 밖에 있다면 [노동자보다] 더 안 좋다. 실업자거나 비공식 부문 협동조합 등에 있는 경우인데, 고통은 고통대로 받고 맞서 싸울 힘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들이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영국은 80년대 패배가 트라우마가 되어 아직도 회복 못 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분들이 노동계급이 끝났다고 말할 때마다 좀 웃음이 난다. 한국 노동계급이 군사정권을 타도한 지 채 25년도 안 됐기 때문이다. 나도 영국 노동계급이 이룬 것을 자랑스러워하지만 영국 노동자들도 [한국 노동자들처럼] 그렇게까진 못했다.

노동계급의 일시적 사기저하, 약화를 사라짐과 동일시해선 안 된다.

어떻게 해야 불안정 노동을 끝내고 불안정 노동자들이 안정적 조건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런던 킹스 칼리지 교수인데 청소노동자들은 대표적 불안정 노동자들이다. 저임금에 불안정하다.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다.

그런데 최근 한 노조가 저임금 청소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몇몇 대학에서 성공했다.

성공한 것은 무엇보다 청소 노동자 자신들의 용기와 과단성 덕분이다. 하지만 교직원노조가 이들을 도운 게 중요했다.

이런 유형의 연대와 단결은 이집트에서 높은 수준으로 진행됐다. 이집트 실업률은 끔찍하다. 비공식 부분에 엄청 많은 이들이 고용돼 있다. 카이로 번화가를 걸어 보면 그냥 사람들이 길에 앉아 있다. 비공식 부문이라는 건 대부분 그냥 여기저기 빈둥대면서 누군가 조그만 일을 던져 주기 기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집트 혁명에선 이들과 조직 노동자 사이에 연대가 일어났다. 조직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 간의 단결이 있었다. 한국보다 비공식 부문이 훨씬 큰 이집트에서 혁명이 일어난 걸 보면 공식 부문 노동자와 비공식 노동 사이 이해관계 대립이 있다는 것이 반박된다.

네 번째 의미는 혁명의 이론과 실천으로서의 맑스주의다. 혁명은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다. 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궈내야 한다. 누구도 그걸 대신할 순 없다.

그렇다고 혁명이 자동이라는 건 아니다. 혁명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 아니다. 대중과 조직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이다. 혁명엔 아래로부터의 자발성뿐 아니라 의식적 조직화도 필요하다.

이집트처럼 첫 타를 날리기 위해서 조직이 필요한 게 아니다. 흔히 혁명은 비공식적인 부문의 첫 투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후 반격을 가한다. 이 때 반격을 제압하기 위해 조직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적 방식, 물리적 방식 등 온갖 방법으로 노동계급이 역사의 주체로 떠오르는 것을 방해한다. 노동계급이 승리하려면 중앙집중화 돼야 한다. 그래야 맞대응이 가능하다. 그래서 정치적 조직화가 필요하다.

루카치는 조직이 이론과 실천의 매개 구실을 한다고 했다.

그가 의미한 것은 이론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맹목적이라는 거다. 이론이 그럴싸해도 실천에서 검증하지 못하면 쓸모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론 없는 실천 역시 맹목적이다. 단지 시도만 해 보고 각각의 시도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이론적 분석이 없다면 체제 타도에 실패할 거다. 정치 조직이 바로 이론과 실천을 묶어 준다.

정치 조직은 이론을 정식화하고 그걸 실천에 적용한다. 현실 적용을 통해 이론이 현실에 얼마나 잘 먹히는지 보고 이론을 수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혁명조직에선 민주적 토론과 논쟁이 그토록 중요하다.

흔히 혁명조직을 말하면 사람들은 상층 지도부가 명령만 내리는 조직을 떠올린다. 혁명조직에서야 말로, 이론을 정식화하고 현실에 얼마나 잘 적용되는지 평가하기 위해서도 민주주의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조직에 가입하면 더이상 개인으로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개별성을 상실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장담하는데 내가 만나본 집단들 중에 괴짜들은 혁명조직에 가장 많았다. 적어도 내 경험상 혁명조직이 개성을 억누른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어떤 집단에 소속돼 있는 건 개성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개인의 역량을 강화한다. 개인으로 자본주의에 맞짱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단지 집에서 TV보고 인터넷만 하다가 사기저하될 때가 올 거다.

세상에 온갖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노르웨이 파시스트가 대낮에 사람을 죽였다는데… 세상은 이렇게 엿같은 곳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혁명정당에 가입하면 이런 파시스트 준동에 반대하는 운동에 동참해 이 파시스트 살인마들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할 지는 자명하다.

결론

우리는 난관에 직면한 세상에 살고 있다. 위기와 혁명이 부활하고 있다. 여러분이 던질 질문은, 이런 역사의 한 복판에서 어디 있고 싶은가 하는 거다. 단지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 보고만 있을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바꾸기 위한 조직화된 투쟁에 동참할 것인가.

만약 후자를 선택한다면 맑스주의 이론과 실천은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