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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바뵈프 - 역사 최초의 혁명적 사회주의 단체 창립자

아래 인용은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전통》(핼 드레이퍼, 노동자연대) 옮긴이 머리말의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바뵈프에 대한 상세한 한글 자료가 웹상에 없는 것이 안타까워 올려 둔다(2017년 2월 21일).

바뵈프 (출처 위키피디아)


[앞부분 생략]

드레이퍼가 이 소책자를 쓴 것은 1966년 겨울이다. 어떤 잡지(New Politics라는)에 기고한 글이었는데도 그 뒤 여 차례 인쇄를 거듭하며 소책자로 출판됐다. 그가 이 소책자를 집필하던 당시에는 영어권에서 관련 사료가 충분치 못해 불가피하게 서술이 불공정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뵈프에 관한 부분이다. 1980년대까지도 영어권에서 흔히 알려져 있기로는 바뵈프는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는데도 쓸모 없는 무장 봉기 음모나 꾸민 블랑키의 선구자 격인 공상적 음모가였고, 실제로 그런 음모 조직(‘평등파의 음모’라는)을 결성했고, 자신이 포함된 소수가 행동할 때 대중의 의사를 무시한 엘리트주의자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사학의 발달 덕분에 사회주의 역사가들이 발견한 ‘역사적 바뵈프’는 이와 상당히 달랐다.

1760년에 태어난 바뵈프는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투옥을 거듭하며 활약하다 1797년 마지막으로 체포돼 처형당했다. 당시 청년 장교였던 보나파르트가 그에 대한 탄압의 총책임자였다. 바뵈프가 이끈 단체에 ‘음모’라는 명칭을 붙여 준 건 바로 검찰이었다. 그 뒤 2세기가 넘도록 되풀이돼 온 국가의 사회주의자 탄압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탄압 때문에 불가피하게 비밀스럽게 활동해야 했던 사실은 무시된다. 그리고 바뵈프와 그의 동지들이 한 활동과 똑같은, 신문 등 정기간행물과 리플릿 등 유인물의 발행, 배포, 판매가 “음모 획책”으로 매도된다. 바뵈프와 그의 동지들이 구축하고 있던 조직에 만일 민중이 붙인 명칭 같은 게 있었다면, 그가 만들던 신문 이름을 따 ‘<인민의 호민관> 그룹’ 정도였을 것이다. 또한, 바뵈프는 테러를 한결같이 배격했고, 검찰측 첩자가 바뵈프를 엮어 넣으려고 그에게 테러 행위를 제안했을 때(바뵈프는 그가 검찰 끄나풀인지 몰랐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바뵈프와 그의 동지들에게 문제가 있었다면, 대중에게 조직을 개방하고 싶은 열의에 찬 나머지 오히려 필요한 음모를 경시함에 따라 보안이 취약해졌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검찰측 증거가 사료로 풍부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바뵈프는 창의성 있는 사상가였고, 재능 있는 조직가였다. 그리고 그가 창립한 단체는 역사상 최초의 혁명적 사회주의 단체였다. 그의 강령이 아직 자본주의적 생산력이 발달하기 전에 제출됐다는 점에서 ‘공상적’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 강령이 내포한 민주적 정신과 그가 조직한 활동들은 오늘날의 변혁 운동이 물려 받아야 할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자본주의라는] 옛 소련 사회의 진정한 본질과 바뵈프에 대한 불가피했던 오해를 논외로 친다면, 핼 드레이퍼의 이 소책자는 자본주의에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회주의의 참뜻을 새겨 주는 데 손색이 없을 것이다.